영아 대학살의 새로운 해석. 중세 그림여행.
반갑습니다. 그림 앞에 오신 모든 분을 환영합니다.
작품을 보니 무섭죠? 죽은 아이가 쓰러져 있고 건장한 사내가 더 많은 유아들을 살해하기 위해 힘껏 칼을 휘두릅니다. 그 와중에 엄마는 자녀를 몸에 안고 살해현장을 벗어나려 몸부림칩니다. 상단에는 구름에 쌓인 두 천사가 지상으로 볏짚을 내려보내고, 하단에는 살해당한 자녀를 눈앞에 둔 여인이 두 손을 모은채 하늘을 바라봅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고 어떤 내용을 담은 작품일까요? 세계에 흩어진 명화를 찾아 세밀히 그 내용을 살펴보는 새로운 유튜브 명화소개 코너, <내 집은 미술관> 지금시작합니다.
이 작품을 처음 대하시는 분은 유아 살해현장이라 무척 놀랐을 것입니다. 그림의 배경은 성경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 탄생에 관한 것인데요. 멀리서 찾아온 동방박사가 헤롯에게, 이스라엘에 새로운 왕인 아기 예수가 태어났음을 알렸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이 소식을 접한 헤롯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두 살이었던 예수의 나이를 참고해, 그가 있을 만한 마을로 찾아가 두 살 이하의 유아들을 전부 죽이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마태복음 2:16)
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 어떤 상징과 의미를 담아 회화 예술로 표현했는지 세밀히 분석해 설명드립니다. 미술사 최초로 해석되는 도상과 설명도 있으니 다른 해석과 참고해 비교해 보시기 바라며 다른 의견이나 해석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화가 귀도 레니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났습니다. 주로 종교 작품을 그렸지만 신화적이고 우화적인 다양한 주제의 유작이 남아 전합니다.
그림 주제에 대한 이상적 아름다움을 다양한 색채를 통해 완성시키려 했으며, 특히 종교의 영원성을 빛에 담아 표현하려 했던 화가입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1611년도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었던 그림입니다.
미식과 학문의 도시로 알려진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에 있는, 볼로냐 국립미술관에 이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볼로냐 도시 속에 자리한 지역적인 미술관이지만 이곳을 찾는 미술감상자들에게 생생한 중세 회화의 진면목을 전합니다. 남부 유럽에 속한 이탈리아이니, 북유럽으로 이동하실 때 이 미술관과 볼로냐 도시를 방문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이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먼저 알아볼 한 인물이 있습니다. 살해를 지시한 헤롯 왕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유아들을 대량 살해했을까요? 분명히 특이한 정신 병력이 있는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며 그림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헤롯이란 이름의 뜻은 "영웅의 아들"입니다. 저돌적이며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는 로마의 속국이었던 당시 유대의 왕으로 재위했으며 열명의 아내와 열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영토를 확장하는 치적을 세웠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불안 요소가 있었습니다. 유대의 왕이었지만 그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혈통이 유대인인 아내를 왕비로 맞이했고, 왕권에서 밀려나거나 폭동에 의해 쫓겨날 것을 늘 염려하며 지낸 인물입니다.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지낸 그에게, 아기예수의 탄생으로 동방박사가 찾아와 왕의 탄생을 언급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평소에 그가 지닌 폭력적 성향이 한순간 폭발했고 어떤 짓을 해서라도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예수가 있다고 판단한 마을을 찾아가 대량 살상을 지시한 것입니다.
참고로, 그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이었는지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기록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정통 유대인인 아내를 통해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아내와 자식도 죽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끔찍하죠? 도대체 몇 명을 살해했기에 대학살이란 단어를 사용할까요? 대학살이나 학살이란 제목만 본다면, 몇십만 명 또는 몇 만 명을 죽인 것 같습니다. 과연 몇 명의 유아가 죽임을 당했을까요?
살해된 유아의 숫자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베델레햄의 인구를 추정하고, 인구대비 유아의 숫자를 추정하고, 그리고서 남아와 여아의 숫자를 추정합니다. 그리고서 최종적으로, 남아 중에서 두 살 난아이의 숫자를 추정합니다. 위의 통계를 바탕으로 밝혀진 숫자는 대략 20-30 명 정도로 추정합니다.
오늘날 이 인원이라면 대학살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죠? 그렇지만 헤롯의 행위가 워낙 극악무도했고 살해대상이 어린 유아였기에, 이 사건을 강조하고자 대학살이란 단어를 붙인 것 같습니다.
성경을 처음 대하시는 분들은, 유아들의 죽음에 많은 의문을 품고 계실 겁니다. 이곳에 다 밝혀드리진 못해도 이런 불행한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성경적 이유가 있습니다.
오래 전인 구약에서부터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 사건이 예언으로 기록되어 왔습니다. 즉 아기 예수가 탄생하면 통곡의 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 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마태복음 2:18)
참고로, 왜 이 구절이 예수 탄생과 영아 살해사건과 연관이 있는지는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구절을 예언할 당시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전쟁 시기입니다. 결국 북쪽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망했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멸망해 참혹한 시기였습니다. 그때 라헬의 자녀가 없어진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갔거나 죽었다는 것이죠.
그때부터 이 기록을 근거로 라헬이란 여성은, 이스라엘 전체 어머니나 여인들을 대표하는 대명사로 사용되고, 그녀의 슬픔은 자식이 있다가 없어진 이스라엘 전체 어머니들의 슬픔을 대표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구약 때 벌어진 어머니 라헬의 자식 잃은 아픔이, 신약 때 예수탄생으로 라마에서 처럼 어머니들의 자식 잃은 아픔이 생길 것이라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베델레헴이나 예루살렘, 라마는 사해 왼쪽에 위치해 있는 마을들인데, 거리는 약 8Km 내에 위치합니다
헤롯이 베델레헴 근방에 있는 자녀들까지 수색해 두 살 이하의 남아를 죽였다고 했죠? 구약 때의 예언이 신약 때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명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배경을 알아봤는데요. 이것을 기초로 작품을 분석해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구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필자의 글에서 가장 먼저 하는 순서가, 구도를 살펴보는 거죠? 이 작품에는 정말 많은 선과 도형이 활용되었습니다.
가장 쉽게 보이는 구도는 좌우를 나누는 중앙선입니다. 상단의 두 건물을 좌우로 나누며 아래의 인물들도 좌우로 나눕니다. 이 구도의 특징은 작품의 제목을 강조하는 구성인데요.
이 선 안에 살해자의 칼이 직선으로 들어 있으며 바로 그 칼 아래에 살해 대상인 유아의 죽음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전통적인 1:3의 비율입니다.
상하를 잇는 두 선이 화폭을 좌우로 3등분합니다. 이 구도는 청색선 안에 들어 있는 양쪽의 건물 벽이 선을 이룹니다. 그 벽의 선의 따라 내려오면 전체 화폭이 3등분됩니다.
다음으로는 삼각형과 역삼각형 구도입니다. 살해자의 쭉 뻗은 팔과 여인들의 얼굴을 연결하면 삼각형과 역삼각형의 구도가 보입니다. 좌우에 배치된 여인들의 얼굴과 몸이 이 삼각형 도형 안에 들어있습니다. 맨 위의 살해자의 팔이 이 구도를 위해 두 팔을 완전히 뻗었습니다.
이번에는 상단부터 하단까지 내려오는 네 개의 그룹인데요. 이 각 층의 그룹들이 작품의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다음으로는 상하 좌우로 구성된 선들을 연결하면 중앙에 작은 사각형이 드러납니다. 이 안에 작품의 핵심 도구인 칼을 넣었습니다. 구도와 선을 활용해 주제인 칼을 강조했습니다.
이번에는 인물들의 대칭입니다. 상단에 천사 두명과 하단 시신으로 쓰러진 어린 아이 둘이 보이죠? 하늘과 땅에 두명의 아이들을 대조시켰습니다. 중앙의 등장한 인물들은 X로 구성해 인물들을 넣었습니다. 이 역시 상하 좌우의 대조입니다.
이 외에도 등장 인물들을 활용한 여러 구도와 구성이 있습니다. 아래에서 각 주제에 맞춰 설명드리겠습니다.
작품 앞에 서신분들이, 가장 먼저 그림으로부터 받는 것은 경악과 비명입니다. 얼굴표정과 작품에서 발산하는 잔인성 때문입니다.
제가 이 작품에서 감명받은 것 중의 하나는, 소리라는 청각적 요소를 회화 속에서 시각적 요소로 변환시킨 부분입니다. 중앙의 칼에서 울려 나오는 원초적 비명소리가 여인들의 얼굴과 몸짓을 타고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이 비명이란 소리는 하단으로 내려가면서 점점 축소되어 최종에는 잠잠하게 되고 결국 그 소리가 사라집니다.
비명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특별한 예외적인 공간이 있는 작품입니다.
그 변화의 움직임이 충분히 감지되죠? 그리고는 이소리가 시각적으로 다시 변환되어 하늘을 쳐다보게 됩니다. 청각적 메시지를 시각적 메시지로 변환시킨 화가의 변환능력입니다.
이런 창의성은 그가 어릴 적, 미술을 시작하기 전에 음악을 먼저시작한 점에서 그 능력의 원동력을 찾아보는데요. 마치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에 나오는 Fortississimo(포르티시시모)에서 Pianississimo(피아니시시모)로 전환되는 부분 같아 보입니다. 음악과 미술에 재능을 지닌 화가의 작품입니다. 참고로 이 화가의 부모는 고향 볼로냐의 음악 가정입니다.
화가는 관객에게 이런 음악적 요소를 제공하는데요. 이것뿐만 아니라 오늘날 보도 사진을 뜻하는 포토저널리즘 같은 장면도 제공합니다. 죽음이 서린 겁먹은 어린 유아의 얼굴입니다. 중앙에 잘 보이지 않게 등장시켰는데요 얼굴 위를 덮고 있는 그림자는 죽음의 묘사입니다. 이 부분만 떼내어 본다면 한 컷의 사진이 열 권의 책 보다 강한 사건 현장의 보도 사진이 됩니다. 애처로운 장면이라 이 부분도 기억에 남습니다.
어머니들에게 시선을 돌려볼까요? 어머니들의 얼굴을 보시면 한 가지 특징이 보이죠? 모두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살해 현장의 생생함을 전달하기 위해 비명과 몸짓으로 청각과 시각적 효과를 나타냅니다. 다만 하단 오른쪽 여인만이 얼굴을 들고 하늘을 쳐다봅니다. 이 작품의 핵심을 담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럼, 이 작품에서 가장 큰 메시지를 지닌 한여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여인은 그림 속에서 단연 돋보입니다. 의상도, 인물의 크기도 자세도 다릅니다. 공포심도, 격앙된 표정도 그녀의 얼굴에서는 읽히지 않습니다. 이미 여인의 아들은 바닥에 쓰러져 죽어있습니다.
그러나 통곡을 하는 대신에 두 손을 잡고, 한 쪽 무릎을 세워 하늘을 향해 기도합니다. 살해 현장이지만 단아한 자태와 표정에 인간의 체념을 넘어선 신앙의 마음이 엿보입니다. 르네상스 이전의 고전적인 자태가 우러나는 이 신비의 여인이 누구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이 여인은 성경에 기록된 특정 여인이 아닙니다. 화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고전적인 인상을 지닌 평범한 여인입니다. 원인 모를 불행에 대해서 동요함 없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기는 신앙인을 상징합니다. 지금 본인 스스로 두 손을 잡고 하늘을 바라보죠? 이런 점을 근거로 직접 성령님께 다가가는 개신교적 교리를 기본으로 하는 화풍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디모데전서 2:5)
이 여인의 손은 하늘에 있는 두 천사와 관련이 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별한 것이 하늘의 천사와 땅의 이 여인을 연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맞습니다. 연결하는 것이 있는데요. 바로 볏짚입니다. 뜬금없이 하늘에서 지상을 향해 던져지는 볏짚입니다. 왜 귀여운 아기 천사가 살육 행위가 벌어지는 곳에 볏짚을 던질까요?
하늘을 보시면 구름 속의 아기 천사들이 승리의 상징인 종려 나뭇가지를 지상으로 뿌립니다. 볏짚으로 언급한 것은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 나뭇가지인데요. 갑작스러운 불행을 잘 극복해 승리하라는 권면으로 보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승리하라는 메시지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 화가는 등장 인물들의 몸을 활용해 U자형의 움푹 파인 골을 만들었습니다. 이 U자형의 골로 하늘에서 던진 볏짚은 하단의 기도하는 여인 손에 떨어집니다. 그렇죠?
관객분들이 이런 정보를 미리 알고서 작품을 만나시면 좋겠습니다. 색과 선과 구도와 구성으로 보이는 평면적인 화폭의 예술을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이 도상 해석으로 인류의 알 수 없는 불행에 하늘이 개입되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작품 속 여인의 꼭 잡은 두 손은 구절의 약속에 따른 것입니다. 아래 시편구절을 보시면 인간의 죽음 중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죽음이 있습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50:15)
회상해 보면 이때 영아들의 죽음도 일종의 순교였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순교로 해석된다면 예수탄생에 따른 첫 번째 순교자들이 영아들인 셈입니다.
이번엔 길(road)에 대해서 언급해 보려 합니다. 이 작품에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시선이 오고 갈 수 있도록 마련된 특별한 길입니다. 신기하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가는 길, 그리고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먼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가는 길을 볼까요?
하늘에 있는 천사의 왼손을 출발해 인물들의 손과 머리와 팔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이 길 끝에는 여인의 기도 손에 다다릅니다.
여기서 다시 역방향의 선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출발지인 하늘에 닿습니다. 인물들의 몸, 특히 팔을 활용한 시선의 흐름입니다.
왜 이 길이 중요한가 하면요. 인류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에 대한 모든 해답이 깔려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 응답이라고 합니다. 미술사최초로 이 채널의 구독자님들만 밟아보는 회화 속 깊숙이 숨겨진 길, 즉 응답을 찾아봅니다.
화가는 이 구성의 완전성을 위해,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인물들의 팔 길이를 줄였고, 양쪽에 위치한 인물들의 간격도 점점 좁혀지게 구성했습니다. 관객들의 시선이 여인의 기도손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점점 좁아지는 인물들의 간격과 아래로 향한 팔의 방향 등을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이 작품에서 예수 또는 십자가 처형이 보이세요? 제 눈에는 두 군데 보입니다. 두 손 위를 보면 여인의 왼팔 의상이 붉은색이죠? 십자가 처형의 예수를 상징하는 도상입니다. 기도하는 두 손 바로 다음에 붉은색이 있음을 유의하십시오.
여인의 오른팔과 색은 단순히 몸의 한 부분이거나 의상이 아닙니다. 팔은 하늘과 땅을 오가는 길이 되며, 붉은색 왼팔 의상은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십자가 처형. 예수)입니다.
붉은색의 상징은 인류의 모든 알 수 없는 고통에 응답해, 단 한 번의 죽음으로 원죄를 위해 대신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왼팔 붉은색은 구원의 통로인 셈입니다.
중세명화 속에 숨겨진 여러도상을 살펴봤지만 이렇게 교묘하게 숨겨놓은 십자가 상징은 보기 어렵습니다. 회화 예술은 색이 곧 언어임을 실감합니다.
의상이 지닌 색의 상징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려 합니다. 이 화폭에 특별한 한 색이 눈에 띕니다. 왼편 살인자가 입고 있는 흰색입니다. 원래 기독교 미술에서 흰 색은 죄가 없는 무오성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이 살인자는 죄가 없을까요? 헤롯왕의 명령을 받아 그 임무를 수행 중이지만, 사단의 계획에 쓰임 받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징은 위선의 상징으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사단의 가장 큰 특징이 위선과 거짓이거든요.
참고로, 여인의 의상색이 황금색, 청색, 붉은색이죠? 모두 예수를 가리키는 색입니다. 이 여인의 모든 것, 두 손, 얼굴의 방향, 표정, 의상의 색, 모든 것이, 해답이 예수라는 것을 알립니다.
이 여인을 쳐다보고 있으면 다윗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별안간 다윗을 언급하니 이상하죠?
다윗의 삶에 작품과 똑같은 사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연이 기록으로 남아있는데요. 다윗의 아이는 살해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쳐서 죽은 것입니다. 먼저 기록을 읽어드리겠습니다. 흥미로운 기록이라고 생각이 들어 조금 길게 그 사연을 알려드리니 양해 바랍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이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불륜을 행해 아이를 가집니다.
알려질 것이 두려워 그 남편인 우리아를 최전장에 보내어 죽게 만듭니다.
이때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다윗은 살겠지만 불륜으로 낳은 아이는 죽을 것임을 알립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 다함이라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죽었느냐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하는지라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차리게하고 먹은 지라"
좀 길었죠?
찾아보니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사건 같아 자세하게 소개해드렸습니다. 이 사건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판단합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보통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슬픔에 울고불고 난리가 나죠? 그런데 다윗왕은 전혀 다릅니다.
금식을 멈추고 즉시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그분께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높이 쓰신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지난 것은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오직 앞에 계신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이 여인을 통해 다윗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위의 기록에이 어진 것인데요. 다윗왕의 당시 심정을 기록한 이 사건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사무엘하 12장 15-25절)
이번엔 여인들의 얼굴을 살펴보겠습니다. 화폭 속의 여인들 얼굴 표정에는 화가가 숨긴 또 하나의 구성이 있으며 살해 현장을 전하는 이 화가만의 표현법이 담겨있습니다.
이곳에 여섯 여인이 등장하는데 특이한 점이 발견됩니다. 위에 있는 여인의 얼굴이 아래로 갈수록, 공포가 줄어들고 현실적이며 이성을 지닌 얼굴로 변합니다.
중간의 여인을 지나며 얼굴이 평온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죠? 표정의 변화와 함께 입모양도 점차 작아지기 시작하며 마지막에는 침묵합니다.
화가는 왜 얼굴 표정과 입 모양과 몸의 액션을 변하게 했을까요? 거리 때문입니다.
상단의 여인은 칼에 가깝죠? 반대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두 손을 잡은 기도의 여인에 가깝죠? 칼에 가까이 갈수록 무섭고, 기도하는 손에 가까이 갈수록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입모양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롯불에 가까이 갈수록 따뜻하며 멀어질수록 추운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얼굴표정과 입 모양? 화가의 숨겨진 도상이라고 해석해 봅니다.
그림 하단 바닥에 있는 아이를 보면 사내 아이임을 나타냅니다. 왜 화가가 사내 아이임을 나타낼까요? 살해의 목적이 두 살쯤 된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기록에 따른 충실한 표현입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기준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마태복음 2:16)
이제, 이 장소의 배경이 되는 상단 부분으로 시선을 옮겨보겠습니다. 하늘이 보이고 승리와 순교로 해석되는 종려 나무 잎사귀를 지상으로 내리는 두 아기 천사가 보입니다. 좌우측에 건물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상징이 있을까요? 좌우 건물이 빛으로 대조되어 있죠? 왼쪽은 밝고 아기 천사가 있기에 천국의 도성으로 해석됩니다.
오른쪽 건물은 반대로 어둡죠? 인간이 거주하는 건물로서 헤롯왕의 왕궁으로 해석하면 좋겠습니다. 그의 폭력성에 어울리게 지금 살인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건물 안을 들여다보면, 아기를 안은 어머니에게 한 정규 병사가 칼을 내려치는 살해의 순간입니다. 왕궁인 점을 감안하고 제대로 차려입은 전투용 갑옷을 볼 때 헤롯왕으로 보셔도 됩니다.
대조의 눈으로 보니 손에 쥐고 있는 것도 서로 다르네요.
왼쪽의 천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지니고 있는데 반해, 오른쪽에는 살인자의 칼이 쥐어진 손이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있고, 그 칼끝 바로 아래에서 살인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칼과 무력만 눈에 띄는 곳인데요. 그래도 화가는 작게나마 풍경을 화폭에 넣었습니다. 이것으로 배경 되는 장소를 알게 합니다. 맨 위를 보면 아치교량으로 수로인데, 전형적인 유럽이탈리아건축물입니다.
아치형 교량을 통해 숲의 풍경이 보입니다. 생명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녹색 나무입니다. 전체 화폭에서 보면 너무 작죠? 참, 안타까운 묘사입니다. 교량 밑에 황급히 피하는 인물들이 보이죠? 당시의 위급성을 알립니다. 도망치는 그 아래로 나 있는 대리석 계단은 큰 왕궁임을 알립니다.
화가가 베들레헴 시골 마을이 아니라 왕궁으로 장소를 잡은 것은 헤롯 왕의 포악성을 알리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영아대학살. 참 관람하기 어려운 주제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부모님이 되거나 자식이 되기에,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설까요? 그림을 떠나며 바라보는 작품에서, 화가가 숨겨놓은 도형 하나가 드러납니다. 이런 고통에 대한 해답이 십자가임을 알려줍니다. 왼팔에 담긴 십자가 상징에 이은 두 번째 십자갑니다.
어느새 입고 나가는 옷의 길이가 길어졌습니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사라지니 무척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 가을에 무척 반가운 소식이 있죠? 한국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저도 함께 축하드리며 더 좋은 글들이 나오길 기도해 봅니다.
날씨가 쌀쌀하니 뜨거운 커피와 함께 마음 녹일 따스한 곳에서, 한 편의 중세명화를 감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과 관련된 것이니 주위에 계신 교회와 성당 친구분들이나 대화방에 공유를 부탁드리며 구독과 좋아요 그리고 알림 설정으로 다음 그림여행을 받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다음 그림 여행을 준비해 곧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 머무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 흩어진 명화를 찾아 세밀히 그 내용을 살펴보는 새로운 명화소개 코너. <내 집은 미술관> 제공이었습니다.
문을 열면
곧
중세로
발길이 옮겨지는 곳
유럽에서
인사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