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인지하는 자의 것이다.
상사의 상사 부친이 떠나시어.모셔진 곳은, 오래전 직장 동료로서 안면만 있던 독산 여자가 떠나 모셔졌던 곳이었다. 아닌말로 그럴만하여 떠나셨을 어르신들 사진 사이에서 홀로 웃는, 사진 속 고인이 너무 젊고 어려서, 우리 부부는 고인과 큰 면식이 없었음에도, 가슴 속에 돌이 눌린 듯 말조차 하기 어려웠고, 나는 드물게도 술조차 넘어가지 않았었다. 젊은 나이에 일찍 부군을 떠나보낸 어린 미망인의 곡소리가 너무 처절해서 오랫토록 굶주렸으나 국수 한 입, 술 한잔 차마 입에 대지 못하고 도로 나와버렸다는 삿갓 김병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비록 삼순구식 三殉九食 할망정 옛 선비의 도리가 마땅히 그러했다.
상사의 상사 역시 사적으로 교분은 없고, 공적으로 불려갈때마다 한두시간씩 꼬장꼬장하게 혼내는, 날카롭고 거칠고 예민하고 무서운 이였다. 사람을 앉혀놓고, 변명 한 마디 못하게 몰고 몰아치면서도 끝까지 답변을 요구하는 모습이, 왜적 깨부수는 충무공 학익진이 이랬을까 싶고, 매일 밤마다 화장실에 불러다 혼내고 때리던 전투경찰 신병 시절을 떠올리게도 했다. 다만 고객사의 요청으로 거대한 생물처럼 매일 출근하면하면기민하게 움직여야 하는 사무실의 고삐를 잡고 무사히 업무를 마치도록 하루하루 지휘해야 하는 이니, 늘 그토록무서울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속으로만 이해했다. 밥 잘하는 유진이도 직장 상사로서 모셨을때는 누구보다 무서웠다. 나는 그녀와 도장에서 사형사매로 교분을 쌓고 나서야 비로소 여리고 고운 속마음을 알았다. 회사 바깥에서 만난 상사의 상사는, 당연히 그렇겠지만 지치고 피로해보였다. 아침 훈련도 제하고 출근 전 서둘러 갔기 때문인지, 남겨진 이들은 상복도 못 갈아입으시었고, 음식도 준비되지 아니했다. 아니, 여기까지 어떻게…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못잇는 상사의 상사께, 상사께서 알려주어 올 수 있었노라 간략히 알려드렸다. 나는 고인께 인사드리고, 봉투를 쥐어드리고 다시 서둘러 출근길에 올랐다.
장례식장까지 오는 길은 먼듯하더니 도로 역으로 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오래전 독산 여자를 보낼 때는, 아내가 운전해주어 역으로 오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므로 인지되는 시간만이 비로소 사람에게 새겨지고 기억된다던, 하이데거와 메를로 뽕띠가 떠올랐고, 시간이란 결국 인간이 겪는 경험의 사후 척도밖에 안된다던 앙리 베르그송도 생각했다. 낯선 길을 올라갈 때야 이 길이 어덴가 여기저기 돌아보니 매분매초가 내게 새겨질수밖에 없을 터이지만, 반대로 익숙해지면 자극이 없으니 무심코 다른 생각을 하다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 놀랄때도 많을 터이다. 그러므로 옛 속담에 신선바둑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 하였다.
정승 개가 죽으면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아니 가는게 세상 이치라지만, 어머님 떠나셨을때, 교인과 옛 직장 동료들까지
구름처럼 몰려들어, 나는 사회인이자 믿음 가진 이가 떠나는 자리란 모름지기 저래야 하는구나 느낀 적이 있다. 그러므로 시간은 이미 남겨져 매사를 직접 겪지 않으면 안되는 이들의 번잡스러운 것이다. 이미 떠나신 분은 속세에 매일 일이 없다. 떠나신 분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