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루크레티우스
벌써 자정하고도 새벽 한시에 가까우니 아침 달리기를 할 수 있을지를 모르겠으나, 하여간 날 밝고 점심 나절쯤에는 소은이 데리고 주말 당직인 아내에게 내려가야 한다. 아버님께서도 이미 기대하시어 먹을 것 잔뜩 가지고 온다시었다. 조금이라도 주말에 놀 수 있으려면, 웬 영어 논문도 하나 읽어야 되고, 훈련 개발 모델이라는 개념도 구상해봐야 하며, 무엇보다 내가 원래 조금씩 읽던 올해의 숙제인 철학VS철학 신/구판과 영어, 한자 공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나마 거의 다 읽어가는 대학大學은 인터넷으로 접속하면 되고, 정 선생님 영어 책이야 얇으니 바로 가방에 넣으면 되며, 기타 읽어야할 논문이며 써야할 글들은, 랩탑 하나 둘러메면 그만이지만, 신구판 다 합쳐 이천 장이 훌쩍 넘는 철학VS철학 2권을 고작해야 1박 2일 여정에 넣는 일은 내 스스로도 미친 짓이다. 난 사실 언젠가는 이 두 권의 책을 제본소에 가져간 뒤, 철학자별로 별도 제본하고 싶다. 다만 그렇게 하면, 이 멋진 책들의 장엄함을 잃게 될까봐 무섭고, 낱개로 흩어진 신구판의 철학자별 제본 약 100여 개를 어떻게 보관할지도 골치 아프다. 나중에 소은이가 크게 되면, 한쪽으로 치워둔 운동기구들도 활용해야 하는데, 지금 있는 L-Bar와 클럽벨과 케틀벨로도 신체 단련은 충분하겠지만, 사실은 영춘권, 홍가권 등 중국 남쪽 문파들의 대표적인 훈련 기구인 목인장木人樁을 진짜 엄청 갖고 싶다. 상대가 없어도 방어를 고려한 공격 연습에는 제격일텐데, 그 커다란 인형을 옥상도장에 둔다 쳐도 눈비 안 맞게 관리할 생각을 하니 좀처럼 쉽사리 엄두가 안 난다. 이래서 법정 스님께서 무소유를 그토록 외치셨는가보다. 어쨌든 도저히 이 두 책을 잠시 읽으려고 짊어지고 갈수는 없었기에 잠 줄여가며 오늘 한 장障이라도 더 읽었다.
강신주 선생은 책 초반부터 플라톤을 두 번이나 인용했다. 그럴만한 위대한 철학자다.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에 대해 논할때, 그는 플라톤의 본질적 이데아와 루크레티우스의 클리나멘Clinamen- 비틀어져 우발적으로 부딪히는 마주침을 비교하면서 노자와 장자의 도道 또한 함께 비교했다. 도덕경의 도가 미리 만들어져 존재의 원리를 설명하는 개념이었다면, 장자의 도는 존재가 먼저 만들어진 뒤 비로소 부여되는 의미 혹은 관계짓기였다. 강신주 선생은 구판과 신판 모두, 나무 이미지, 비 이미지 등 여러 심상을 활용하여 시각적으로, 세상이 만들어지는 근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런지 신판에는 안 그래도 두꺼운 책에 삽화도 제법 실려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모든 사유는 언어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해왔다. 먼저 속으로 되뇌이고, 그 말을 다듬어 밖으로 내보내어 사람과 이야기 나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속으로 그림을 그리는게 더 먼저였지 않는가 싶다. 먼저 그림을 그려두고, 그 그림을 다시 언어로 설명하여 내 스스로를 납득시킨 다음, 다시 한번 말을 다듬어 밖으로 내보내는 방식으로 우리는 생각하고 관계맺는게 아닐까? 내가 학부 시절 읽었던 아르놀트 겔렌의 인간학적 탐구에서도, 가장 좋은 것은 상황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 그림을 설명하는 언어가 탄생한 것이라고 말했고,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지시적 의미만 잘 파악하면, 철학의 문제는 모두 풀 수 있다고까지 단언하였다.
비록 술을 많이 줄이긴 했지만, 완전히 끊지 못한 나는, 교회 집사고, 그래서 나 역시 플라톤의 연장선상에서, 본질적 이데아와 같은 절대자가 있다고 당연히 믿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우연이 어찌 없으랴만, 큰 계획은 모두 이미 응고되고 결정된다.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과연 그림이 우선일까, 그림이 우선일까. 오래 전 혜능선사는 글을 전혀 몰라서, 자신의 깨달음을 동료 승려에게 알려주며 벽에 적어달라고 했었다. 그 이후 혜능의 제자들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달아 기어이 불립문자 不立文字까지 주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아직도 말에 매여 있는 사람이라, 사실 불가의 간화선 등에 대해서는 파악하기가 너무 어렵다. 읽는 성경이나 잘 읽어볼 일이다. 오늘도 졸려서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