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눈 치우기
퇴계의 제자들은 제 잔 자리 치울줄도 모르고, 마당 앞 비질 한번 하지.않으면서 담론으로 허명 虛名 만 좇는다고 질타하던 남명 조식 선생의 말을 여러 차례 인용한바 있다. 어릴때부터 허리에 방울달고 칼을 차서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던 꼬장꼬장한 대선비다우시다. 학자라면,.마땅히 이론 이전에 실천 먼저 앞세워야한다는 결기는, 그 옛날 장군이면서 철학자였던 양명 왕수인과도 같다. 한편으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 어린아이와 같은 이가 천국에 들 것이고, 길가다 주리고 힘든 이에게 대하는 일이 곧 그 분을 대함과 같다셨다. 남명 선생과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공동체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기초 도덕을 말한다. 학자랍시고 윤리를 지키지않고, 교인이랍시고 나 혼자 구원받겠다 나서는 이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경받을리 만무하다.
저녁 무렵 눈이 푸지게 왔다. 딸이야 좋겠지만, 늦게 출근하여 늦게 퇴근하는 나로서는 어머니 아버지밖에 안 계시니 누가 눈 치울까 걱정이 앞설수밖에 없다. 제 집 이고 사는 달팽이라면 차라리 나을까. 처자식 부모님 있는 집 한 칸 빌어사니 그 앞 거리 치우는 일이 마땅하다. 사실 산을 돌보는 일을 오래 하는 아내는, 임신한 몸으로도 눈 한 번 기가 막히게 잘 치웠다. 현역 군인 저리 가라할 정도로, 안 그래도 큰 키로 눈을 휙휙 잘도 쓸었다. 없는 아내 불러올릴 재주는 없으니. 늦은 밤에도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 타고 겨우 퇴근하여 어머니 아버지가 겨우 한켠에 쌓아올리신 눈더미와 집 안의 큰 빗자루, 눈삽을 보았다. 나머지 일은 내 몫이었다
흰 눈에 달빛이 사방으로 튀어서 가로등.없이도 밝을 지경이었다. 짙푸른 빛의 바다로 풍덩 빠진 기분이었다. 최근 근력 훈련을 늘렸더니 온몸의 힘으로 눈을 가득 퍼서 옮길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힘이 있다는건 타자他者에게 좋든싫든 내 의지를 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비토리오 그리골로의 노래를 들으며 남은 훈련하듯 눈을 치웠다. 눈들은 치워도 사방에서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