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가 Hei가 되던 순간.
승객 여러분, 편안한 비행되셨습니까?
잠시 후 우리 비행기는 목적지인 핀란드 반타 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현재 기온은...
내 인생 비행기를 타고 처음 외국에 갔던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때로 돌아간다.
교회 합창단에서 선교 여행으로 필리핀에 갔었는데 어린 나에게는 무려 4시간이나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것이 큰 설렘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자리에 앉기도 전에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익스큐즈미, 웨얼 이즈 더 레스트룸?" 하고 물어봤던 것이 아직도 생각난다. '정말 이 사람이 내 말을 알아들을까?'호기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이다.
4시간의 비행이 너무나 짧고 아쉬웠던 어린아이였는데, 10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의 나는 '어떻게 하면 비행기를 최소한으로 탈까?, 비행기에서 숙면을 취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길고 긴 비행시간을 달래기 위한 책과 영화들을 주섬주섬 챙기곤 한다. 비행기 안에서의 꿀잠을 위해 여행 가기 전날 최대한 늦게 자는 것은 나의 고정된 비행 습관 중 하나였다.
2016년 8월 30일. 다음날 핀란드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여느 때처럼 밤늦게까지 노래를 다운받고 여권과 카드, 학교에 내야 할 각종 서류들을 챙기며 시간을 보냈다. 기존의 여행 준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설렘보다는 긴장되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는 것이랄까. 그리고 이 마음은 전날 밤을 거의 지새웠음에도 불구하고 핀란드 헬싱키로 향하는 8시간의 비행 동안 나를 잠 못 들게 했다는 것이랄까.
"승객 여러분, 편안한 비행되셨습니까?
잠시 후 우리 비행기는 목적지인 핀란드 반타 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현재 기온은..."
드디어 도착이다. 입국심사 대 앞에 일행 없이 혼자 온 조그마한 동양인 여자 아이가 여권을 내밀자 심사관의 표정이 굳어진다. 약간은 경계하는 듯한 표정을 읽은 나는 눈치 빠르게 거주허가증(핀란드 비자)을 내민다. '음. 합법적으로 들어온 학생이군.' 찌푸렸던 그의 미관이 펴지며 살짝 미소 짓는 표정에서 그의 생각이 읽힌다. 경쾌한 입국 승인 도장 소리와 함께 내 발걸음도 경쾌해진다.
난생처음으로 도착한 나라, 핀란드. 그곳의 공기는 낯설고 차가웠지만 깨끗했다. 통 유리창을 가득 채운 파아란 하늘에 흰 구름을 배경으로 한 울창하고 푸르른 숲이 나를 반겨주는 듯했다.
"Hi, Finland! (안녕, 핀란드!)"
"Welcome, Yenji! (환영해, 옌지!)"
마음속으로 수줍은 인사를 주고받아본다. 어쩐지 긴장감이 누그러지고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잘해보자 핀란드!' 마음속으로 되내어본다.
짐을 찾고 나오니 튜터 디에나와 안나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딱 봐도 내 덩치만한 캐리어를 두 개나 낑낑거리며 끌고 가는 내 모습은 단순 여행을 목적으로 핀란드에 온 것이 아님을 말해주기에, 디에나와 안나는 나를 보는 순간 내가 한국에서 온 그들의 튜티, 옌지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눈을 맞추며 웃었고, 나는 "하이~" 그 둘은 "헤이!" 하며 인사한다. 곧이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포옹은 나를 살짝 당황케 했지만, '그래. 난 지금 핀란드에 왔지. 서양인들은 허그에 좀 더 익숙하니까.' 하며 자연스러운 척 포옹을 받는다. 후... 갑자기 영어를 써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한국어 모드에서 영어 모드로 애써 머릿속 언어 스위치를 누른 후 내뱉은 첫 말은 "내가 갑자기 영어를 쓰려니 익숙지가 않아. 혹시 좀 틀리거나 잘못 알아들어도 이해해줘."였던가.
핀란드에는 유학생을 도와주기 위한 튜터가 있다. 같은 과 선배들이 지원해서 튜터 역할을 하는데, 학교에서 약간의 용돈을 받고 후배들이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봉사하는 개념이다.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튜터가 두 명이나 배정되었는데 디에나는 루마니아에서, 안나는 러시아에서 온 국제 학생이다. 이들도 핀란드가 뿌리는 아닌 모양이다. 디에나는 핀란드에서 5년 넘게 거주 중이긴 했지만.
모든 것이 낯선 상황에서 튜터 둘은 어디론가 척척 나를 이끌고 간다. 같은 외국인인데 어색함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 둘은 이미 내 눈엔 핀란드 사람 같아 보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틈에 내 캐리어는 그들 손에 맡겨졌다. 조그마한 체구로 어찌 그리 씩씩한지. 나도 덩달아 씩씩하게 걷는다. 앞서가던 씩씩이 튜터 둘이 멈추는 걸 보니 버스를 타려나보다. 노란색 판에 버스 모양이 그려진 팻말을 보니 버스 정류장임이 분명하다. 10분쯤 기다리니 멀찍이 크고 노란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버스를 타며 "헤이!"하고 운전기사와 안나가 인사를 주고받는다.
'헤이? 자꾸 헤이라고 인사하네. 영어에서 말하는 헤이! 그런 건가?'
궁금한 마음에 물어보니 핀란드에서는 '안녕'이 하이가 아니라 '헤이'라고 한다. '아, 그래서 아까 나를 보자마자 헤이!라고 했구나.' 그제야 이해가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정식으로 핀란드와 인사를 나눈다.
"Hei, Finland! (헤이, 핀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