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옌지 Jan 24. 2021

전구를 달아보셨나요?

어서 와, 핀란드 집은 처음이지?



Emmauksenkatu 9,

20380 Turku, Finland.




드디어 집에 도착이다.

이제 핀란드에서는 이 곳이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이다. Emmauksenkatu? 저 긴 낱말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일단 구글 지도에 북마크 해둔다.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찾을 수 있게.




핀란드에서 내가 거주할 곳은 헬싱키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투르쿠'라는 지역이다. 지도를 살펴보면 핀란드는 의심의 여지없이 유럽 대륙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중에서 투르쿠는 핀란드의 최남단 서쪽 해안을 끼고 있는 도시이다. 핀란드 전체 인구가 서울 인구의 반 정도인 500만이니 도시라고 해도 인구밀도가 매우 낮지만, 그래도 핀란드에서는 헬싱키 다음으로 탐페레와 투르쿠가 서로 더 큰 도시라며 나름대로의 도시 부심을 갖고 있는 곳이다.



바로 이 곳, 투르쿠에 우리 집이 있다. 튜터 디에나와 안나를 따라 버스를 두 번이나 환승해서 '집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그래, 이제부터는 여기가 우리 집, 아니. 나의 집이다.



핀란드에는 기숙사의 개념이 없고 학생에게 대여해주는 여러 형태의 집들이 있다. 원룸 형태의 아파트부터 애완동물을 키울 수 있도록 잔디밭이 넓게 있는 주택까지 학생의 필요에 따라 원하는 집을 신청할 수 있다. 집의 위치 역시 투르쿠 도시 전체에 걸쳐 이곳저곳에 분포해있다. 학교를 걸어갈 수 있는 곳부터 버스로 약 30분이 넘게 걸리는 곳까지, 학생들은 선택권을 가지고 본인의 집을 마련한다.

기숙사가 아닌 '학생 아파트, 학생 주택'의 개념은 나에겐 무척 낯선 것이었다. 한국에서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살았던 교대 기숙사는 4인 1실에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이 복도에 있으며, 자정 전에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으면 벌점을 받는 곳이었기에. 이곳은 말 그대로 '기(보낼 기)숙(잘 숙)'사. 즉, 집이라기보다는 잠 시간을 보내기 위한 곳이었다.

지금도 문득문득 '그때는 어떻게 거기서 살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룸메들과 함께 치킨 먹는 순간이 그리 행복할 수 없었으니 '그저 정말 어렸었구나.'라고 결론지었다.




기숙사를 생각했는데 집이 생긴다니!!!

핀란드에 오기 전, 한국에 있을 때 미리 내가 살고 싶은 집을 선택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혼자 사는 것보다는 플랫메이트가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방은 각자 쓰고 거실과 부엌, 화장실을 3명이서 쉐어하는 집을 신청했다. 현재로서 핀란드에 유일하게 아는 사람 두 명 중 한 명인 안나가 바로 옆 동네에 산다는 것도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고, 버스로 20분 정도면 학교에 도착하니 거리도 꽤 괜찮은 것 같았다. 거실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방은 각자 쓰기에 프라이버시도 어느 정도 보장될 것 같았다. 같이 쉐어하는 친구들이 괜찮은 사람들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서울 토박이인 나는 주로 아파트에 살았기에 주변 나무와 키를 맞춘 아담한 주택 집에 왠지 모를 설렘을 느꼈다.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작은 잔디밭을 지나 나오는 흰색 집, 계단을 7개쯤 올라가면 보이는 2층 왼쪽 집이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니 깔끔한 거실이 있고, 거실 앞쪽으로 부엌이 연결되어 있었다. 부엌 앞쪽과 거실 뒤쪽에  창문이 있어서 나무들이 시원하게 보이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방은 부엌  오른쪽 방이었는데   역시 열쇠로 문을 열어야 했다. 아무나 들어올  없는 방이라니,  안에 집이 있는 느낌이라서 왠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것은 흰 벽, 흰 책상, 흰 옷장, 매트리스 없이 텅 빈 흰색 침대 프레임, 흰 창문. 모든 것이 하얗다. 거의 텅 빈 공간에 내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그곳의 벽에서 약간의 외로움을 느꼈다. 조금이나마 따뜻한 기운을 채워볼까 하는 마음으로 벽 한쪽에 있는 스위치를 켜자, 둔탁한 '탁' 소리와 함께 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 다.

그렇다.

전구가 없었던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갖추어진 안락함이 나를 반길 거라 생각했지만... 나 혼자뿐인 이 곳에서 안락하고 편안한 집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야 했다. '전구는 또 어디서 구한담 말인가?' 핀란드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찾는 첫 물건이 전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황한 내 표정을 이해한다는 듯 튜터 디에나는 전구를 사러 가자고 제안한다. 바로 근처 마트에서 살 수 있다며. 해가 지기 전에 얼른 불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쫄래쫄래 디에나를 따라나선다. 디에나를 따라 대략 20분쯤 걸으니 Prisma라는 큰 마트가 나왔다. 전구 코너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전구가 진열되어 있다. '뭘 고른담?' 난생처음 이렇게 다양한 전구를 관찰해보는 것 같다. 노란빛을 선호하는 유럽 사람들의 특성상 하얀 빛의 등은 없었기에, 대부분 노란빛의 전구 사이에서 그나마 희미하게 하얀 전구와 전구 캡을 하나 골랐다.



집에 돌아와 전구를 뚝딱 설치하는 디에나를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어떻게 이런 걸 하지?'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을 듬뿍 담아 디에나와 진~~한 허그를 나눈다.






창 밖을 보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이리 멋진 풍경을 눈 앞에 두고도, 흰 등이 밝게 빛나는 한국 집이 생각나는 밤이다.




어쩌면 그 곳에 있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이 벌써 그리운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마. 분명히, 그게 맞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Hei, Finlan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