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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Nov 14. 2022

뭘해도 너만 보여. 근데 니가 어떻게 이래?

에브리씽에브리웨어올앳원스

*영화 에브리씽에브리웨어올앳원스의 내용이 포함된 글입니다.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경우 엄마가 되고 나서의 삶은 그 전의 삶과 분명히 다르긴 하다.


엄마가 되기 전의 나는 순하고 이기적이었다. 무엇과도 싸울 이유가 없었고, 착한 척하면서 그냥저냥 살면 되었다. 내 생각만 하며 살면 됐기 때문에 순하게 살 수 있었다. 정의가 어떻게 되든, 세상이 어떻게 되든 관없었다. 평화롭게 나 편하게 살면 되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는 좀 바뀌었다. 아니 저렇게 자원을 막 낭비하면 어떡해? 저 차는 왜 저렇게 위험하게 운전하지?돈 있다고 지들 맘대로 해도 되는거야?전에 관심없던 것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목소리도 내기 시작했다. 내 아이가 살 세상이 너무 망가지면 안되니까.


엄마들이 그런 말 자주 하지 않는가?나도 결혼 전엔 여성스러웠거든? 아등바등 살려고 하다보니까 이렇게 억척스러워졌지!

그네들의 인생보단 훨씬 편안한 삶을 살고 있지만 아이를 키우다보면 전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에브리씽..속 양자경을 보면 전사가 된 엄마들이 보인다. 어딘지 어설퍼보이는 남편과 드러내놓기 어려운(그녀의 가치관으로는) 성소수자 딸을 데리고 연고도 없는 이국 땅에서 가정을 건사하려면, 그녀는 노래방 기계 산 돈도 빨래방 경비처리를 하고 뻔뻔하게 구는 얼굴 두꺼운 아줌마가 돼야했을 것이다.


그렇게 아득바득 사는 게 누구좋으라고 그러나 싶은데 어쩐지 삶은 더 엉망이 되어가는 것 같고, 가족들은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다. 대체 왜 이 모양이 된 걸까.


내가 나 좋자고 이래? 니네 좋자고 이러는데 나한테 왜 이래?


왜 이렇게 됐는지 사실 에블린 본인만 모르고 그를 지켜보는 이들은 알고 있다. 아이고 아줌마, 그렇게 할 필요까진 없잖아요. 좋아하고 사랑한다면서 왜 상처를 줘요?


이 영화는 다중우주라는 설정으로 에블린이 스스로에게 중요한 것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독특하게 보여준다. 어딘지 주성치 영화같기도 한 연출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리며 보고 있다보면 갑자기 눈물이 핑도는 이상한 경험을 하게 한다. '베이글 블랙홀' 같은 어이없는 설정을 보는데 왜 가족을 생각하고 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지 어리둥절. 이런 흡인력이 이 영화의 매력이고 감독의 역량인가 싶다.


나는 이런 독특한 연출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영화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이 가서 초반 몇 분간은 스토리를 따라가는게 조금 버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마침내 내가 영화 속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게 한다. 어이없는 분장을 한 조이(딸)이 화면을 들여다보는데 왜 내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지. 아마도 국적에 상관없는 보편적인 감정이 본능적으로 느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이 산만한 북새통에서 그걸 느끼게 하다니 대단한 감독이다.


영화 내내 아까 분명 기분 좋았던 것 같은데 왜 지금 갑자기 기분이 안 좋은지 모르겠는, 삼각함수보다 어려운 사춘기 딸내미 생각이 났다. 아 이 녀석에게 '조부 투바키'(이 이름을 자꾸만 틀리는 것도 엄마들 특징...ㅜㅜ)가 들어있는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그 녀석이 보고 싶다. 돌아가면 따뜻한 눈빛으로 봐줘야지 했지만 여전히 나는 툭툭거리는 무뚝뚝한 엄마. 그래도 전사가 되어만 가던 나에게 힘으로만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이 영화가 왠지 위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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