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가 고장났다
TV가 고장났다. TV없는 거실이 한창 유행하기 시작할 무렵에도 "역시 거실엔 TV", "TV는 거거익선!"을 외치며 대형 TV로 갈아치우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던 나에게는 정말 큰 사건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어떤 곳인가. AS 하나는 기깔나게 하는 곳이 우리나라 아닌가. 인터넷으로 접수만 하면 내가 원하는 시간에, 하루이틀 안에 방문해주는 기사님들의 나라니만큼, 나는 당연히 인터넷으로 제조사를 찾아 고장접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소까지 다 넣은 끝에 나는 청천벽력 같은 문장과 마주하게 된다. 요컨대 "요즘 폭염 등으로 가전 점검 접수가 폭주해서 인터넷 접수 못받겠다"는 얘기였다. 단언컨대 내가 직접 AS를 접수하기 시작한 근 20년 AS 생활에 처음 보는 문장이었다. 아니 그럼 주소 넣기 전에 얘길하던지. 이럴리가 없어.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 더 시도해봤는데 나는 저 문장을 몇 번이나 더 보게 됐다.
사실 이때만 해도 어떻게 되지 싶었다. 이 다음 주에 휴가로 집에 없을 예정이었으니까. 휴가지에서 전화해서 예약하면 돌아오면 서비스 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대단한 착각이었다. 휴가지에서 전화 접수를 시도한 결과 제일 빨라도 3주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역시 십수년 AS 생활에서 처음 듣는 문장이었다. 전화 응대 하시는 분도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본인 잘못이 아닌데도 자꾸만 "정말 너무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뭐 어쩌겠는가. 기다려야지. 그래도, 설마, 중간에 어디 빵꾸라도 나서 그 전에 오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선.
그러나 여전히 우리집 TV는 사용 중단 상태다. 열흘이 넘었다. 아예 안 나오면 모르겠는데 소리는 멀쩡하게 나온다. 아무래도 백라이트 수명이 다 된 것 같다는데. 소리는 또 나오니 혹시나 해서 자꾸만 틀어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갔습니다.
TV없는 생활은 어떨까. 뭐 별 변화가 있겠나 했다. 꽤 큰 모니터를 달고 있는 데스크탑도, 노트북도 태블릿도 있고, 내 손에서 떨어질 일 없는 스마트폰에서도 영상 쯤이야 언제나 볼 수 있는데.
하지만 늘 예상과는 다른 것이 현실이다. 아이들과 남편이 모두 집을 비우면 모닝커피를 마시며 TV를 틀어놓고 한숨 돌리는게 루틴이었던 생활에서 TV가 빠지니 제법 달라지는 게 많았다.
우리는 대형 식탁을 놓고도 식구가 다 같이 밥을 먹을 땐 TV앞에 상을 펴고 가벼운 예능이나 틀어놓고 깔깔대는 편이었는데 TV가 안 나오니 굳이 상을 깔 이유가 없어졌다. 각종 잡동사니 거치대가 됐던 식탁이 오랜만에 제모습을 찾았다. 나와 남편은 하긴, 허리에도 입식생활이 좋다던데. 잘됐어....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딘지 어색하다. 애써 긍정회로를 돌리는 느낌이다. 이게 뭐라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빠진 식탁은 여전히 대화가 계속되지만 확실히 텐션은 조금 떨어진 느낌이다. 사실 어쩌면, 이게 진짜 우리다. 한껏 예능감 넘치는 '남의 텐션'이 빠지고, 대체로 I인 우리집 식구들의 온전한 분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왠지 이 분위기가 낯설다. 나도 이런데 아이들은 더욱 그렇겠지. 유튜브를 큰화면으로 못 보게된 큰애가 찡얼거린다.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이게 맞는 것 같은데..아닌가?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TV를 보느라 몇 달 동안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소파에서 할일(?)이 대폭 줄어들다보니 오랜만에 글이나 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재는 여전히 TV이야기. TV가 내 인생에 이렇게 비중이 큰 아이템인가. 어쩐지 좀 한심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여전히 기사님이 기다려진다.
이쯤되니 TV가 바보상자가 아니라 아무래도 내가 바보인 것 같다. 아니, 바보가 보니까 바보상자가 맞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