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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리피언 Aug 29. 2024

게으른 여행자의 런던 여행기(에필로그)

진짜 마지막 이야기

아.. 이제 진짜 마지막 런던 여행기다. 쓸 만큼 썼다.

여행을 다녀와도 글을 한 개 정도 쓰곤 했는데 이번 여행기가 이렇게 길어진 것은 여행의 감흥을 오래 남기고 싶어서다. 되씹고 되새기다보면 추억도 오래가지 않을까 해서. 그만큼 즐거웠고, 행복했다. 쓸만큼 쓰고도 남은 자투리들을 이 글로 남겨본다


영국은 우리나라와는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서인지, 확실히 문화적인 차이가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런던에서 처음 재미있다 생각이 든 건 대중교통 안에서였다. 기차역에 가기 위해 전철을 탔는데 뭔가 낯설었다. 뭐지? 생각해보니 내가 탄 칸에서 다른 칸 의자가 보이는 그림이 낯설었다. 곡선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지하철 선로에서는 다른 칸 문이 열려있으면 대부분 보이던 공간이 보이는데 지하철 선로가 곡선인 곳이 있다보니 다른 광경이 보이는 것. 버스를 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곧은 길이 보이는데, 런던은 꼭 시내 길이 곧게 뻗어있지는 않았다. 런던의 지금 길이 근대의 마차길을 그대로 살린 것이라던데 아마 그래서 그런 것 같다.


도심에서 차량의 제한 속도는 20마일, 오염 문제 등으로 차량 진입 제한도 많고, 그러다보니 차를 타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이랬다면, 너무 불편한 일일 것 같다.


이렇게 불편함을 느끼게 해서 차량을 줄이는 것은 옳은가? 글쎄. 옳든 그르든 이것은 그들의 방식이다.

또 하나 낯설었던 것은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이었다. 얼굴 색 뿐 아니라 스타일다양했다. 점잖은 정장부터 최소한의 복장으로 러닝을 하는 사람들, 무지개 빛깔 머리색, 금발, 은발, 흑발, 갈빛의 머리색.

인터넷에서 해외로 일하러 갔던 사람이 인천공항 출입장에 들어오면서 다 비슷한 스타일의 사람들을 보고 "아, 나 집에 왔구나" 한 적이 있다는 글을 본 적 있는데, 런던에서 보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생김과 꾸밈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약간의 긴장감이 생겼다. 하지만 곧 익숙해졌다. 고작 며칠이었는데도. 우리나라도 요즘 다문화화가 진행되는 느낌인데 우리의 미래도 이런 느낌일까.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다지만, 우린 딱히 불쾌한 경험은 없었다. 오히려 기분 좋은 경험은 많이 했다. 캐주얼한 대화에서 오는 편안함이 있었다. 영국은 법적으로 왕실이 인정받는 계급사회지만 사람 사이의 계급은 오히려 느껴지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는 특히 서비스 상황에서, 업무 중에 분명한 갑과 을이 있고, 갑이 할 수 있는 언행과 을의 언행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꽤 많다. 엘베에서 만났을 때 "어때? 방 좋았어?" 물어보는 호텔 직원들을 보고 우리나라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목례만 나누거나 "고객님 불편하신 점은 없었습니까?"라고 극존대를 했을 것 같은데 저 캐주얼함은 쾌활하게 느껴진다.

런던에선 많이 걸었던 게 좋았다. 사실 걷기 좋다고 말하는 건 인사치레고 걷는게 나았다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계 최초로 지하철을 건설한 나라답게 대중교통이 잘 돼있긴 한데 공사 중이거나 뭐 파업 때문에도 멈춘다고 하고, 갑자기 내리라고도 한다. 냉방시설이 없어 지하철에서 기절하는 사람도 있다고도 한다. 우버는 잘 오다가 기사가 취소하기도 하고 타도 한참 걸린다. 하지만 게으른 여행자에게 많은 것은 시간이니, 그냥 걷는다. 걷다보면 공원이 나온다. 돗자리를 펴고 혹은 그냥, 퍼질러 앉고 눕는다. 귀찮은 게 많기로는 올림픽 나가도 될 딸아이가 아빠, 걸어도 되면 버스 타지 말고 그냥 걷자고 했을 때 오, 런던 대단한데?라고 생각했다.


여행이라 그렇지 불편한 점도 많았다. 특히 우리 둘째를 가장 불편하게 했던 건 무단횡단이다. 사실 우리나라와 일본 정도 말고는 무단횡단을 참 많이들 하는데 런던도 마찬가지다. 아마 차들이 워낙 느리게 달리다보니 위험하지 않을 때는 그냥 자연스럽게 건너는 것 같았다. 역시 그냥 그들의 방식이다.

원칙주의자 둘째는 굉장히 당황스러워했다. 나는 약간 잘됐다고 생각했다. 원칙을 지키는 것 좋은 일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아주 이상한 사람들만도 아니라는 점을 아이가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어서다.


총결산을 해보자면, 이번 여행에서 잘 한 것은 가이드 투어를 두 번 정도 한 것과 주방기구가 있는 레지던스 호텔을 반 정도 잡은 것, 또 느슨한 여행을 한 것이다. 남편이 사진을 많이 찍고 싶다며 카메라를 산다고 할 때 좀 투덜거렸지만 그냥 놔 둔 것도 잘한 일이었다.

잘 챙긴 것은 간편식과 돗자리, 경량 우양산, 장바구니 등이었다. 특히 장바구니는 1파운드 내고 비닐봉투를 사다보면 뼈저리게 필요함을 느끼게 될 것. 이런 걸 금융치료라고 하나보다.


여행기의 제목이 게으른 여행자의 여행기인 이유는 우리의 여행이 참으로 느슨하기 때문이다. 관광명소를 꼭 보고 오겠다는 생각이 없고, 맛집을 꼭 가봐야한다는 생각이 없다. 야경은 못 보면 안 보는 것이고, 나는 고소공포증이어서 전망대가 좁고 높으면 포기한다. 여행에서는 꼭 해야 하는 것보다는 내가 해서 좋은 것 위주로 하곤 한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이번에는 사진이 좀 아쉽다. 많이 찍었는데도 더 찍을걸. 남편이 새 카메라까지 장만해서 찍었지만, 나도 더 열심히 찍을걸. 여행기를 쓰다보니 없는 사진이 많다. 더더더 많이 찍을걸. 앞으로는 더 많이 찍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큰애는 런던 다녀왔다고 하면, 진짜 영국만 갔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간 김에 다른 나라도 가지 그랬냐는 이야기일 거다. 옆나라 가기 쉬운 곳이니까. 이건 별로 안 아깝다. 사실 9일 동안 런던도 다 보지 못했다. 더 구경할 곳, 가고 싶은 곳이 많았다. 그냥 우리 여행 스타일이라는 게 그런것 같다. 길을 걷기만 해도 좋은 것이 우리 게으른 여행자들의 여행이니까.


이번 여행은 나에게 근사한 활력이 됐다. 다시 글을 써보고 싶어졌고, 영어도 다시 공부하고 싶어졌다. 다시 걷고 싶어졌고, 다시 여행하고 싶어졌다. 게으른 여행자는 다음의 게으른 여행을 다시 꿈꾸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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