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때문에 피곤했지만, 그래도 잘 말랐다. 다음 날은 본초자오선이 있는 곳, 그리니치에 갔다. 숙소에서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택시로 40분 정도 거리로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런던 도심에서는 거리가 제법 있었다. 교통수단으로는 택시를 택했다. 거리가 좀 있긴 하지만, 아침부터 힘을 빼는 것은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여행에서 하루 만오천보 정도는 우습게 걷고 있었으니까. 볼트를 불렀는데 23파운드 정도 나왔으니 4만원이 좀 안됐다. 대중교통으로 오면 내려서도 15분 인상 걸어야 하기 때문에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숙소 근처에서는 보기 힘든, 진짜 런더너들이 사는 모습을 차창 너머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리니치의 사연을 들여다보면 세계를 제패하던 시대 영국이 과학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바다를 통한 세계 제패를 꿈꾸던 영국에게 하늘과 땅은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 곳에 가기 전에 오디오가이드를 따로 구매해서 들었는데, 가이드에 따르면 이들은 여기서 합숙을 하면서 연구를 했단다. 물론 가족까지 모두 이 곳에 들어와서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했다니, 진짜 야망이 대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니치천문데와 본초자오선(가운데) photo by 남편
보통 본초자오선에서 사진을 많이 찍는데, 다녀온 후기들을 살펴보니 밑의 공원이 정말 좋다고 한다. 우리가 경도 0도에 서 있다는 증명사진을 한 장 찍고는 나가서 구경했는데 과연 전경이 훌륭했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한바퀴 돌고, 아래로 내려가 동네를 구경했다.
그리니치에는 천문대도 있지만, 대학교도 있고, 공원도 있고, 마켓도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를 채우고 공원에 가기로 했다. 이날 드디어 우리는 피시앤칩스를 처음 먹었다. 하도 맛없다, 잘하는 집에 가면 맛있다 말이 많아서 평이 좋은 집을 찾아갔다. 피시앤칩스도 종류가 많았다. 대구(cod)와 해덕대구(haddock)를 시켰는데 타르타르 소스를 찍으니 맛있었다. 문제는 감자튀김이었는데 간이 하나도 안돼 있었다. 소금이나 식초를 뿌렸으면 달랐을까. 소금 좀 달라고 말이나 해볼걸 그랬다. 섬나라라 소금이 귀할 것 같진 않은데.
그리니치 공원. 돗자리를 펴고 한가롭게 누웠더니 런던 온 게 실감났다.photo by 남편
배도 부르고 슬슬 산책 겸 그리니치 공원으로 갔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을 나무들이 정말 컸다. 높기보단 넓은 나무들이 풍부한 그늘을 만들어줬다. 한국에서부터 들고 간 돗자리의 쓰임이 시작됐다.
두 시간 정도 쉬고 떠난 오후 목적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가장 좋은 교통편은 우버택시 같다. 네 명이 편도 40파운드 정도. 25분 정도 타는데 7만원이 넘는 가격이 제법 부담되지만, 이 노선은 런던의 가장 번화하고, 명소가 많은 타워브릿지, 런던브릿지, 런던아이를 모두 지나기 때문에, 유람선 타는 대신 한번 정도는 타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배 안은 생각보다 제법 넓었고, 배를 타고 런던의 명소들을 차례로 지나는 것도 좋았다. 규모가 큰 것들은 가까이 보는 것과 멀리 보는 것이 다르지 않나. 곧 다시 볼 명소들을 눈에 넣고, 웨스트민스터 정거장에서 내렸다.
내려서 5분 정도 걸으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나온다. 색이 진하지 않아 지나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앞에 서면 압도되는 규모. 왕실의 결혼식장 겸 유명인들의 무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이 이 곳이었고, 뉴턴, 스티븐 호킹 등 과학자들이 이곳에 묻혔다.
사원의 내부는 정말 유려한 조각들로 가득차 있다. 수많은 인파를 헤쳐가며 구경 중인데, 어떤 할아버지가 쫓아와서 우리 아이에게 모자를 벗으라고 했다. 약간 당황했는데 돌아다니면서 모자 쓴 관광객들 모두에게 그러고 계셨다.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는 어떤 남자는 "저 사람에게도 말하지 그러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사원에서 신에 대한 존중을 보여달라는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어주는 게 나쁠 것 없는 것 같았다. 아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는 모자를 벗어들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photo by 남편
규모와 분위기에 압도돼 한참을 걷고 난 뒤 빅밴 앞에서 역시 증명사진을 찍고 숙소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을 찾고 있는데 큰애가 공원(세인트 제임스'즈 파크)을 보더니 "우리 저기서 잠깐 쉬어 가면 안되냐"고 한다. 안될게 뭐 있겠나. 런던에 왔으면 아침 공원, 오후 공원 두 번은 가야지. 다시 돗자리를 펴고 드러누웠다. 공원 한켠에는 아이스크림차가 와 있었다. 부드러운 소프트 아이스크림 한 개씩을 먹고 돗자리에 누우니 신선이 따로 없다. 오후 5시쯤인데 퇴근하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기온은 30도에 육박하지만, 살랑살랑 바람을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맛이 바로 런던에서 느낄 수 있는 꿀맛이었다.
런던 시내를 걸을 때 돗자리를 휴대하면 언제나 신선놀음을 할 수 있다.photo by 남편
여기서 두어 시간 정도를 쉰 뒤 우리는 다시 숙소 쪽을 향해 걸었다. 어딘지 아쉬웠던 피시앤칩스를 잊을 맛집을 찾아서. 그리고 우리는 이번 여행 최고의 맛집을 만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