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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Dec 20. 2023

나에게 첫사랑의 기억이 있다면

풋풋했던 대학교 새내기. 단체 활동에 별 관심 없던 내가 학교에 적응하기 수월했던 이유는 바로 그 친구 덕분이었다. 큰 키에 깔끔한 옷차림, 둥글둥글한 성격, 그 당시 꽤 잘 통했던 개그 코드까지. 그 친구를 보기 위해 학교에 열심히 갔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사랑의 기억은 바로 스무 살 그때였다. 


수업이 끝나면 과 친구들 여럿이 같이 모여 밥 먹고, 당시 유행하던 보드게임을 하고, 저녁땐 술 한잔씩 기울이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다 집에 가곤 했다. 당시 그 친구는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괜찮았다. '언젠가 헤어지면 내게도 기회가 올 수 있겠지' 생각하며 기다림의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내 다른 과 동갑내기와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그게 아마 스무 살 겨울 이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생각보다 꽤 많이 슬퍼했다. 친한 친구를 만나 맥주를 마시며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오늘처럼 눈이 소복이 예쁘게 쌓였던 그런 날이었을 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거 아닌 일인데 나는 매우 진지했다. 그때의 감정을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부정하고 싶진 않다. 스무 살이라면 응당 그래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요즘은 오히려 그때의 감정이 더 소중하게만 느껴진다. 그 이후 나는 누군가를 만날 때도 내가 먼저 많이 좋아해 본 적도, 기다림의 설렘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면 별거 아니지만 스무 살 겨울 그때에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감정을 표현해 볼걸. 물론 시간이 한참 지나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때의 나를 생각하게 한건 얼마 전 그 친구가 결혼을 하겠다며 청첩장을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학을 먼저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다 보니 대학 동기 남자 친구들과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잘 안 되곤 했지만 그 친구와는 적당히 안부를 주고받으며 연락을 이어나갔다. 스무 살 때의 아픔은 생각보다 빨리 잊혔고 어쩌면 그 당시 그 친구가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리는 바람에 남은 미련 없이 그저 좋은 친구로 대학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게 지금 생각해 보니 고맙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안부를 묻고 결혼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그 친구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는 거다. 우린 대학 생활의 꽤 많은 부분을 함께 했는데 여럿이 모여 밥 먹고 술 마시고 놀기에 바빴지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거나 각자의 취향과 가치관에 대해서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청첩장을 앞에 두고 처음으로 진지한 대화를 해본 그 친구는 꽤 괜찮은 친구였다. 배려심도 깊고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마인드도 좋았고, 또 생각보다 현실적이고 냉철한 면도 있었다. 나처럼 감정기복이 심하지 않아 언제 어디서든 슴슴하고 담백하게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고 멀리 있는 혹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화려한 것을 쫓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친구를 좋아했었다는 게 어쩌면 다행이었다. 내가 좋아할 만한 모습이 내면에 가득 차 있었는데 오히려 어릴 땐 그걸 몰랐으니. 아니, 어쩌면 그게 더 아쉬운 걸까.


그래도 나는 진심으로 친구의 결혼을 축하할 수 있었다. 


스무 살 그때, 분명 내 감정이 다 겉으로 드러났을 텐데 그래도 단호하게 끊어줘서, 그리고 내가 민망해하지 않게 모른척하고 지금까지 좋았던 시절 좋은 친구로 남아줘서 새삼 고마워진다. 


눈이 예쁘게 내리는 오늘, 오랜만에 추억해 보는 그때 그 몽글몽글한 느낌. 달콤하고 씁쓸하게 지나가버린 첫사랑의 기억. 조금 짜치지만 그래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때 잘 버틴 스무 살의 나에게도 고생했다고 한마디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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