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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die Mar 23. 2024

우리는 또 봄

적당히 찬 공기가 데워진 봄의 시작, 어느 주말. 곳곳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달큰히 들리는 나른한 오후. 따가우리만치 데워진 햇빛은 "이게 바로 비타민 D야."라는 적당한 핑계로 그의 손을 붙들고 걷기 좋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니 평소 만나던 때보단 조금 더 느지막이 일어나 차분하게 가려진 암막 커튼 사이를 기어코 비집고 들어온 햇살에 뒹굴거리는 느긋함을 챙기며 한참을 포근한 이불에 안겨있었다. 완벽하게 미적거리다 겨우 몸을 일으켜 따뜻한 물로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서, 말끔해진 얼굴에 화장을 했다. 앞에는 구루프를 뒤에는 머리끈을 묶어 머리칼을 온전히 다 치우고서 깔끔해진 모습으로 그가 오기 전 아주 오랜만에 주방에 섰다.


미리 주문해 전날 저녁 받아놓은 재료들을 냉장고에서 꺼내 눈앞에 하나 둘 펼쳐두고서, 어떤 걸 먼저 할지 준비 시간에 따라 순서를 정한다. 우선 느끼함을 잡아줄 오이를 새콤달콤하게 무쳐 간이 배게 두기로 한다. 오이를 중간 얇기로 썰어주고 설탕과 식초, 다진 마늘로 간을 해 적당히 버무려 한데 두고, 찹 스테이크를 할 고기의 핏기를 제거한다. 곧이어 야채 손질을 시작으로 파스타와 찹스테이크를 준비해 본다.


음식을 하는 중간중간 조카의 재롱을 페이스타임으로 간간히 보며, 양껏 웃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음식을 하다 보니 '아, 참. 나는 지금 간을 볼 수가 없음을 깨닫는다.' 굉장한 속도로 나는 나를 파악했다. 이런. 나를 무디게 만든 감기를 모르는 채 등 뒤에 달아 두고, 바짝 입의 촉을 깨운 다음 당당히 눈대중으로 요리를 한다.


사실 나는 레시피에 준해 완벽한 계량으로 요리를 하지 않는다. 간을 보지 않고 하는 것에 익숙하긴 하지만, 하지 않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고, 자주 하지 않는 종류의 음식을 하려니 막상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사실은 괜찮지. 어떤 음식이어도, 행여나 독을 탓 대도 싱긋 웃으며 맛있게 먹어줄 사람이 있고, 역시 나는 나를 믿으니.


간단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정성을 담은 음식을 거실 한편에 둘이 마주 보고 앉아, 잔잔한 장난을 치며 나누어 먹고서 선선한 바람에 맞춰 적당한 걸음으로 집 근처 카페로 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크림을 앞에 두고, 둘 이선 처음이지만 왠지 서로가 익숙한 듯 각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서 열심히 골라온 책을 펼쳐 들었다.

 

조금 갑갑한 공기와 온도에 민감해져 붉어진 얼굴이 된 나를 위해 커피를 가지러 간 사이 창문을 살짝 열어둔 그에게 또 한 번 새삼 다정을 느끼고, 조금은 슬프기도 했다가 기쁘기도 했다가. 이름만 아는 이의 일기장을 펼쳐 읽었다. 지난번 읽다 멈추어 책갈피를 끼워 두었던 부분이 제법 앞페이지였는데, 마지막 페이지까지 쉬지 않고 단숨에 읽어나갔다. 중간중간 공감에 사무쳐 미적지근한 눈물을 훔치며, 슬쩍 그를 훔쳐보기도 했다가 하면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자마자 괜히 한참 못 본 사람처럼, 아주 오랜만에 본 것처럼 열심히  부비적 대고 나서 슬그머니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을 열어 펼쳐든 sns엔 오늘 어느 곳에 어떤 꽃이 피었단 소식이 먼저였고, 꽃으로 가득한 나의 알고리즘에 의해 다음 장소는 자연스레 그곳이 되었다.


내가 가자고, 내가 하자고, 내가 먹자고. 어떤 것을 제안해도 무심히 '그래, 서연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고만해서 한 번씩 정말 관심의 총량이 다했나 의심 가득 불만을 태우다가도, 가만히 보면 그럼에도 나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 주는 사랑 가득한 배려에 또다시 설레기도 하는.


내일이면 처음 만난 날로부터 1주년이 되고, 곧 우리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기 시작한 날로부터 1주년이 되는 우리. 나는 우리로의 우리가 좋다. 나로 가득한 그의 생각도 배려도 늘 감사하다. 부족한 관심이라 매일 지독한 투정을 부리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완성된 마음이라는 것엔  완전한 확신이 있으니, 이건 분명히 사랑이라 하겠다.


봄이다. 다시 새로운 우리는 또 봄이다. 계절을 모두 지나 다시. 우리는 우리로 늘 또 새로울 테지만, 봄처럼 늘 설렌 네 번의 계절을 돌아 난 언제나 봄처럼 당신을 보고 있었음을. 당신이 알리는 없을 테지만.


곁에서 무슨 글을 끄적거리는지 슬쩍보다 일기 쓰냐는 물음을 던지곤 달아난 당신이 귀여워서, 내 마음이 또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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