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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die Aug 24. 2024

일기

사랑, 다정 그리고 족쇄

아침에 눈을 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아침 일찍  퇴근하는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친구에게 아침밥을 제공할 테니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고, 둘은 오랜만에  쓸데없는 노이즈로 아침을 보냈다. 티격태격. 친구와 내가 대화하는 방식. 장면을 보고 듣는 주변인들은 그 친구와 나의 대화방식에 곧잘 웃음보가 터지곤 했다. 친구와 나는 꽤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고, 서로를 너무 잘 아는 탓에 주어 없는 대화로 티격태격 하지만 거즘 타격이 없었다. 혹여나 한 번씩 의도찮게 불편해진 분위기가 되어도 금세 곧잘 풀어지고, 서운했어도 그냥 그러려니가 되는 거의 유일한 사람. 신기하게도 만나면 그렇게 티격거리면서 떨어지면 궁금한 사이.  묵은 관계일수록 조심해야 한다고 누군가 말을 한다. 근데 우습게도 조심할수록 어색해지는 우리는 그냥 티격태격이 지금까지와 같은 관계유지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친구와 오랜만에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빠르게 흐른, 생각보다도 긴 시간을 집에서 함께 보내고, 잠시 바깥구경을 나갔다가 이것저것 쓸데없는 것들을 구경하고 좋아하는 캐릭터 볼펜과 군것질거리 몇 가지를 손에 들고서 헤어졌다. 나는 친구가 데려다준, 출발 전 미리 예약한 네일숍에 들러 지저분해진 손톱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가면 밤동안 못 잤던 잠을 반드시 자리라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다시 잠에 들지는 못했다.


뜨거운 여름. 해는 자기가 빛을 내면서도 분명히 살려달라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그사이의 낮. 밤이 찾아오기엔 꽤나 긴 시간이 남은 하루의 애매한 시점. 나는 갑자기 미뤘던 침대 매트리스 커버와 이불을 빨아야겠다 생각이 들었고, 호르몬제 복용으로 평소보다 더 부풀어진 엉덩이를 겨우 들고일어나 침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덮던 이불을 먼저 세탁기에 돌려놓고 다시 돌아와 매트리스 커버를 벗겼다. 에어컨이 시원찮은 건지 낑낑. 머리에선 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17도. 17도로 튼 에어컨이 참  소용이 없다. 겨우 끌러 내리고서 잠시 넘어져 있었다. 커버도 한쪽으로 잘 치워두고서 어제 해둔 빨래를 걷어와 대충 개어 넣고, 뜨거운 공기가 두렵지만, 잔뜩 겁을 먹은 심장을 부여잡고, 창을 다 열고서 청소기를 돌렸다. 위이이잉. 시끄러운 통돌이가 먼지를 다 먹어줄 때쯤 향초도 켰다. 오래간만에 기분이 좋아져서 편백 소독제를 여기저기 뿌려두고, 건조가 어느 정도 될 때쯤 다른 빨아뒀던 매트리스 커버를 씌우고, 다른 이불을 꺼냈다. 밤새 잠을 못 잔 탓인지 이불이 무거운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신없이 움직인 탓인지. 기운이 다한 나는 그대로 잠시 뻗어있었다. 허리를 쭉 펴고 눕자마자 띠리리링. 세탁기가 엉덩이를 들라고 나를 잔뜩 놀리고 있었다. 젠장. 이불을 으악 으아아악,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겨우 널어놓고 커버를 돌렸다. 이젠 좀 쉴 수 있겠지, 잠깐 누워서 핸드폰을 들었는데 끝난 빨래. 오늘따라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 느끼며 겨우 커버를 널어놓으니 세탁조가 거슬린다. 거슬린 김에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세탁조 클리너를 넣고 통 세척을 시작했다. 어차피 버튼만 눌러주면 세탁기가 할 일이니까. 아, 오늘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생각했더니 이것저것 한일이 많았네. 드디어 지친 몸을 누이고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5시 반.

 

시간이 참 빠른 하루였다. 정신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기분이 좋아서였을까. 다한 체력에 30분만 자자고 누워서는 또 한참을 릴스를 봤다. 이젠 씻어야지, 더는 미룰 수가 없잖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씻고 나왔다. 남자친구와 저녁식사를 하러 가기 전 데이트 준비를 하는 시간. 역시 남자친구를 만나기로 해서 시간이 잘 갔던 걸까. 준비를 끝내고 남자친구를 만났다.


분명 얼굴 본 지 오래 지나지 않았음에도 너무 오랫동안 못 본 것처럼 반가운 사람. 조잘조잘 쉬지 않고 떠들며, 둘은  고기를 먹으러 갔다. 여기서 뻔하지 않았던 것은, 며칠 전부터 시작한 치아 신경치료 중인 탓에 남자친구가 잘게 잘라주는 고기를 아기새처럼 받아먹었다는 것. 굽는 내내 잘게 자른 고기를 먼저 내 앞에 가져다주는 남자친구와, 그걸 받아 쌓인 내 앞접시가 꼭 아가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설렜다. 고기를 맛있게 구워 잘게 잘라, 나부터 챙겨주는 그 사람을 보고 있으니 너무 설렜다. 어른의 설렘 같았달까. 아 물론, 나를 챙긴 그 있는 그대로도 설렜지만, 뭔가 이 사람이라면 나중에 결혼해 아이가 생기더라도 걱정 없겠다, 아가도 나도 잔뜩 사랑받겠구나. 내 앞에 저 사람의 다정이 부족함 없는 사랑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해서 설렌다는 게. 꼭 어른의 설렘이란 생각이 들었달까.


그렇게 꼬박 사랑받고, 사랑받는 밤을 지나고, 오늘은 우리가 우리로 함께 시간을 보낸지 100일 즈음에 맞춘 커플링을 찾으러 대구에 왔다. 주문했던 반지가 두 사람의 손에 끼워지고, 이제 빼지 못할 족쇄를 찼다고, 명심하라고 그에게 말했다. 물론, 반지를 맞추기 전부터 그 얘기는 주구장창 해왔지만. 지금은 교육을 들으러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며 카페에 앉아 졸면서 이 일기를 쓰고 있다.


언제 와,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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