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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D Feb 29. 2024

넘어. 너머.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2020


    ‘일곱 해의 마지막’은 왕성했던 창작의 시기 이후 일인 지배체제의 돌입과 함께 사상의 언어, 또는 사회의 언어로부터 음소거된 기행의 목소리를 추적한다. 검열과 강요가 만무한 창작 의도 속에서 기행의 시적 세계는 실존의 다양한 무늬를 강탈당한다.

    인간의 실존이란 물과 같은 것이고... 그 모두를 하나로 뭉뚱그려 늘 기뻐하라, 벅찬 인간이 되어라, 투장해라, 하면 그게 가능할까? (pg. 31)

    단 하나의 ‘주어’를 위한 언어 - 마치 언어를 통합하려 했던 인간의 욕망을 목도한 신이 언어를 해체해 버린 고대 바벨탑 이야기처럼 - 애초에 불가능한 언어의 동일화를 기행은 어떻게 저항했을까?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개인의 미약한 투쟁은 인생의 불가항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스스로가 구현하려 했던 삶의 범주를 넘어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기형도 시의 한 구절처럼 기행은 “언어를 잃고” 무엇으로 삶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프랑스, 스위스 출신의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는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닌 반영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일곱 해의 마지막’의 이야기 또한 정확한 현실의 구현이 아닌 저자가 해석한 한 줄기로서의 현실이다. 우리는 기행의 일곱 해를, 일곱 해 전을, 일곱 해 이후를 정확히 알 방도가 없다. 그러나 허구를 통해 진실의 실체를 묻게 되듯 다양한 허구들이 집합된 곳 틈 사이로 진실의 또 다른 각도를 목격할 수 있지 않을까.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 (pg. 191)

    김연수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실존 인물이었던 시인 백석 (본명 백기행)을 작가의 해석 안에서 재구성하여 탄생됐다. 역사적 인물의 입을 빌려 시대의 자화상과 그 자화상을 묘사하는 인물의 고뇌의 점증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줄리언 반즈가 소련의 작곡가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인생을 각색해서 쓴 ‘시대의 소음’을 떠올리게 한다.

    당대 사회의 지침에 의해 억압된 창작의 자유, 또는 신념을 배신해야 하는 예술가의 자아를 다룬다는 공통점에서 이 두 소설은 억압에 대한 액션 (작동)으로서의 예술과 억압에 대한 리액션 (반동)으로서의 예술 간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궁극적으로, 영속되는 예술의 존재 목적에 대한 고찰까지 이끌어 낸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삶이라는 축은 다양한 해석을 통해 뚜렷해진다. 한 개인의 삶의 범주를 넘어서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들의 공유 안에서 말이다. 기행과 쇼스타코비치는 당대 억압된 사회로부터 개인의 목소리를 박탈당했지만 우리 현대인들도 다른 의미에서의 ‘시대의 소음’과 ‘언어의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개인의 자유분방한 호소가 추앙받는 현대 시대에서 공동체로서의 사유가 폄하되는 아이러니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은 만들어가는 것이라 했던 ‘병도’의 말처럼 세상은 여전히 무수한 규범의 건설과 파괴를 반복해 나간다. 그러나 현실을 구축하는 과정 가운데 기행이 언급했던 나란히 실현되는 ‘순수의’ 세계를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 차원을 증명하는 것이 예술 존재의 이유 가운데 중대한 하나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엽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2022년 6월 6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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