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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D Mar 23. 2024

왜냐하면 시절은 시차를 모르고

강아솔 / 사랑의 시절 2018


“모르는 사이 피어나는 꽃. 나는 꽃을 모르고 꽃도 나를 모르겠지. 우리는 우리만의 입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모르는 사이 지는 꽃. 꽃들은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죽으면 사물도 죽는다. 내가 끝나면 사물도 끝난다. 다시 멀어지는 것은 꽃인가 나인가. 다시 다가오는 것은 나인가 바람인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을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꽃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 이제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中  pg. 158  

   위의 글은 강아솔 3집 ‘사랑의 시절’을 발동시킨 아주 고마운 시의 한 구절이다. 팬의 입장에서 아티스트의 행보는 언제나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 내막에 창작의 고통을 감내한 아티스트의 사정까지 가늠하고픈 오지랖은 어떤 심보일까. 한 곡, 한 곡 노래들을 듣는 동안 옛 아픔들이 훑고 간 나만의 시절들이 떠올랐다. 지나가야만 했던 아픔과 지나가지 못한 아픔이 뭉툭한 바늘이 되어 나의 어딘가를 쑤시고 있었다. 창작의 고통을 위한 연료로 사용된 강아솔의 시절들. 그 시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수록 그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나의 이야기들이 조건반사처럼 표명되었다. 음악이 선사하는 연대가 이런 것일까. 누적되어 가는 각자의 시절 속 잠재된 너와 나의 회로망을 향한 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힘 말이다. 


   “타인의 고통은 연민이 아니라 연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인권활동가인 수전 손택의 지침처럼 인간은 고통이라는 계절 속에서 타인들의 기후를 일기예보 마냥 예측해 낸다. 그렇다, 타인의 고통은 얼추 그럴듯한 온도로 공유된다. 물론 그 온도의 실상은 자신이 설정한 온도계에서 자의적으로 측정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전환시킬 능력이 없다. 하지만 타인의 삶에 참여하는 주체로서 무능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기심과 무심함의 산술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것이 바로 ‘개인’이라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설명되지 않는 실존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희망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기이한 조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누어보고자 한다.  


   타인과 나 사이에 온전히 교환될 수 없는 것은 시차다. 상흔의 시절들이 일었다 가라앉는 모든 틈 사이사이 홀로 견뎌내야 하는 나의 시차. 한 시절을 함께한 모든 이들의 눈을 피해 내밀한 곳으로 도망가는 각자의 시차.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시간을 비추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상태나 인식에 따라 흐르는 이론적 시간이 아니라 고유하게 체화되는 시간, ‘나라는 사람이 나로서 살아가는 실재적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앨범을 듣는 이들이 비스름히 느끼는 모종의 기후 속 개인의 시차와 이야기는 다르게 체감된다. ‘나’는 자신이 아니면 겪을 수 없는 절재적인 규칙이다. 그 시절의 네가 없어서 외롭지만 그 시차의 나만 있어서 나는 필연히 고독하다. 나만 있을 수밖에 없는 모든 시공간에서 불가피한 시차를 홀로 겪어내기 때문이다. 

돌보지 못하는 저마다의 마음이 있는 걸까 / 들여다볼수록 더욱 외로워져만 가는 / 모든 게 다 내 탓이라 말하는 것만 같아 / 이런 나는 나를 앓고 살아가야 될까 - [from 섬] 

   시차를 시각화한다면 섬이 되지 않을까. ‘우리’라는 대양 속에서 홀로 떠다니는 수많은 ‘나’들의 섬 말이다. ‘섬’을 시작으로 그녀가 겪어온 시차들이 줄줄이 노래들로 둔갑했다. 누군가의 시절을 엿들을 수 있다는 쾌감과 야릇함 속에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우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씁쓸함의 원인은 소란스러운 나의 시차들의 움직임이었다. 강아솔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를 요동시켰다. 정확히 말해 이야기들이 가지고 있는 미세한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남일’ 같지 않은 공감대를 조작했다고 해야 할까. 엄밀히 말해 아티스트의 개인적 사정까지 미치는 나의 오지랖은 곧 나에 대한 회기이자 소환의 소일거리뿐이다. 타인에게 양도된 나의 흔적들을 되찾는 생존본능의 요구인 것이다.  

어디에 놓고 온 걸까 / 잃어버린 것만 같은 내 안의 빛나던 말들 / 아직도 당신에게 머물고 있는 건지 – [from 당신의 파도] 
우리가 사랑한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 당연히 여기던 마음이 돌연히 불안해져 와 / 결국에 우리는 저무는 노을빛의 석양이 되었네 – [from 아름다웠지, 우리]
내게 찾아오는 매해 봄과 함께 / 피어나는 당신으로 간직된 나만의 봄이 있지 – [from 연홍] 

   그렇다면 이제 나는 자신에게 물을 수 있다. 나의 시절은 무엇으로 그 의미와 연료를 얻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정답은 애당초 앨범 제목 안에 새겨져 있었다. 개인의 역량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기이한 조건은 바로 ‘사랑’이다. 

   그렇다, 강아솔의 ‘사랑의 시절’은 그 시절들의 파생지인 사랑을 향한 찬미이자 새로운 부탁이다. 더 큰 대양으로의 도약이자 용기이다. 외롭지만 함께 외롭고 낯설지만 함께 낯설자라며 손을 내미는 고백이자 눈물겨운 선포이다. 자신의 어둠과 한계를 통해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다른 이들의 뾰족한 상처를 인지하며 안아주듯, 연대는 스스로를 겪어내는 모두를 사랑이라는 미지의 조건 속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그 부름에 응답하는 누구나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 


   사랑하는 존재는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내는 존재일지 모른다. 사랑이 사치가, 또는 음모가 되기도 하는 이익-손해의 이분법적 시대 속 ‘사랑의 시절’은 효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간의 가치는 수치화되고 차별은 더 많은 이름으로 세분화되어 세련되게 사람들 사이를 훼방 놓는다. 그러니 사랑의 시절이 없다면 사랑하는 ‘나’의 시차도 있을 리 없다. 

   사랑하는 시절들이 다분히 많이 필요한 나날이다. 아니,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은 언제나 패해가며 이기고 도망가며 제 자리를 지켜냈다. 그렇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는 터무니없이 거창한 사랑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사랑을, 가여우며 초라한 사랑을 ‘힘껏’ 믿어주는 일 밖에 없을 것이다. 상흔의 자리에서 새살이 돋을 것이라는 끈질긴 믿음. 믿음에 부응하는 사랑이 아닌 사랑에 부응하는 믿음. 사랑이라는 바다가 우리라는 섬을 힘껏 지탱할 것이라는 믿음. 

그래도 우리 그래도 우리 / 힘껏 서로를 사랑해 줄래 – [from 그래도 우리] 


2020년 11월 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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