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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D Feb 19. 2024

너를 기다리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터미널 / 스티븐 스필버그 2004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中


나세리의 자서전 The Terminal Man

   ‘터미널’은 실제 존재하는 인물에 대한 사건을 각색하여 만들어진 영화다. 이란 국적의 실존인물 메르한 카리미 나세리는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던 청년이었다. 고국을 방문하던 중 그가 왕정 시위 반대에 참여한 사실이 유출돼 체포된다. 나세리는 그의 어머니의 도움으로 인해 석방이 되지만 단 석방의 조건으로 조국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추방 이후 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이방인의 삶을 이어간다. 벨기에에 거류하던 중 UN의 도움으로 여권을 발급받지만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서 그만 여권을 분실하게 된다. 신분증의 부재로 인해 나세리는 그날부터 불가피하게 난민자의 신세가 되어 드골 공항 구석 한 칸을 자신의 보금자리로 트게 된다. 그의 난민/노숙의 생활은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28년의 기간 동안 이어졌지만 그 덕에 그는 ‘알프래드 경’이라는 공항의 유명한 공공 인물로 불리게 되었다. 나세리는 공항에서의 영구적 삶을 자처했지만 몸에 이상에 생겨 결국 다음 해에 자선 단체의 도움으로 파리에 거주하게 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나세리라는 인물의 기나긴 망명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의 응축된 동화로 풀어낸 영화가 바로 ‘터미널’이다. 실제 사건에 의해 비교적 단축된 유랑의 시간을 다루고 있지만 결코 그 이야기와 교훈이 간결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보장되지 않는 유랑의 경험을 겪고 싶게 만드는 기이한 충동을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영화의 줄거리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빅터 나보스키는 조국 크라코지아를 떠나 미국 JFK 공항에 입국한다. 어떤 우연의 장난에 의해 빅터가 비행을 하던 도중 조국 크라코지아는 내란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그가 미국 뉴욕에 도착해 있었을 때 이미 크라코지아는 무정부 국가가 된 상황이었다. 무국적자로 판명된 신분과 송환할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사면초과의 사태에서 빅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곤 ‘기다림’, 우연과 운명이 번갈아 던지는 구제의 동아줄을 붙잡고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빅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다림과의 생존법을 구축해 간다. 국제선 환승 승강장에 둥지를 틀고, 공항 직원들과 우정을 맺으며, 목공 전문가의 모습을 인정받아 터미널 내부 건설에 취직을 하고, 미모의 승무원 아멜리아와 데이트까지 한다.

   어느 날 아멜리아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진 빅터는 그녀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승강장에 초대한다. 나폴레옹이 연인 조세핀에게 분수를 선물했던 것처럼 빅터도 아멜리아를 위해 승강장의 벽 한 면을 개조한 분수대를 보여준다. 서로에게 솔직해진 그 시공간에서 빅터는 아멜리아에게 입국하면서 가져온 통조림 캔을 보여주며 자신이 뉴욕에 온 이유에 대해 말해준다.

   빅터의 아버지 디미타르 나보스키는 열혈한 재즈 팬이었다. 어느 날 그는 신문 한 면에 실린 뉴욕의 재즈 뮤지션들의 단체 사진을 보게 된다. 그 이후로부터 디미타르는 단체 사진 속 57명의 재즈 뮤지션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며 답례로 그들의 친필 사인을 받게 된다. 그러나 전 멤버 중 베니 골슨의 사인만은 오지 않는다. 디미타르 일생의 기다림은 40년간 이어지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마지막 답장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빅터가 뉴욕에 오게 된 이유는 바로 베니 골슨의 사인을 받아 아버지의 오래된 소원과 기다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아멜리아도 빅터에게 자신의 기다림의 이유와 대상에 대해 말해준다.

   아멜리아는 잘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루에도 수십 번 그녀가 사랑하는 ‘불륜남’의 연락을 기다리는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갔다. 그렇게 빅터와 아멜리아의 미묘한 마음은 닿을 듯 기어이 닿지 않는 두 개의 섬이 되어 저무는 밤에 나란히 녹아든다.

   

    영화의 말단에서 크라코지아의 내전은 끝이 나며 아멜리아의 도움으로 빅터는 뉴욕에 하루 동안 입국할 수 있는 특별 비자를 받게 된다. 공항의 직원들의 열띤 환호와 응원을 받으며 빅터는 뉴욕 시내로 향하는 택시에 오르게 되고 아멜리아는 그녀를 찾아온 불륜남의 품에 안겨 지독한 사랑의 고독한 행복을 맞이하게 된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극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이 둘은 연극 내내 일관적으로 한 인물의 귀환을 기다린다. 그 인물이 바로 ‘고도’라는 사람이다. 고도는 두 인물의 대화 속에서 끊임없이 거명되지만 이 ‘고도’가 누구인지는 독자/관객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올 듯 올듯하면서 결국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혹은 기다려내는 이 기이한 희극은 프랑스의 비평가인 로베르 상피니의 해석 속에서 가장 탁월하게 조명된다. 그는 ‘고독를 기다리며’의 주제인 실존적 현실에 대해 설명하며 이 ‘기다림’이라는 가치를 대체되거나 마모되는 조건으로 성립하지 않고 그 자체로 실존을 해명해 내는 이유로 정의한다. 대상, 환경, 변화 등의 기초적 조건이 아닌 삶의 본연적 형태로 기다림이 존재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인생의 크고 작은 변화들은 기다림이라는 토대에서 발생한다. 기다림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생산적 활동을 멈추는 상태가 아니라 가늠할 수 없는 인생의 사건들과 우연들을 암시하고 맞이하는 태고의 상태이자 삶의 영속성을 입증하는 법칙이다. 언제까지나 기다림의 지속 가능한 조건 아래서 삶의 불가항력은 두드러지게 반영된다. 쉽게 말해 기다림이라는 삶의 양식을 통해 우리는 삶의 무한한 가능성을 인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다림을 ‘길’ 그 자체로 비유한다면 전환점은 그 길 중간중간 마주치는 ‘정거장’으로 비유할 수 있다. 기다림이 영속되는 곳에서 삶이라는 여행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데이트 전 조금 일찍 준비하고 나와 애인을 기다리거나, 여름 방학 직전 종강의 벨소리를 기다리는 일과 같은 일상을 구축하는 실체적인 기다림부터 사유의 성장 또는 의미의 발견과도 같이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는 원초적 기다림 안에서 삶은 오색찬란한 점층법을 빚어낸다.


   물론 하염없이 시간적 기다림을 ‘실천’한다고 해서 운명과도 같은 해결책이 수면 위로 떠오르거나 명확한 방향이 잡히는 것이 아니다. 기다림은 직접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설사 그런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다림의 본 형태를 식별할 능력이 없다. 기다림은 언제나 제 실체를 애써 묻는 사람들에게 가슴을 치게 만드는 답답함, 또는 구토를 유발할 것과 같은 메스꺼움으로 현현한다. 느슨하게 일렁이는 신기루 혹은 첫사랑의 미련처럼 기다림의 보폭은 언제나 인생의 속도를 앞지르거나 뒤처져있다. 순간적 차원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은 기다림의 부피를 도려내어 시시각각에 걸맞은 피복을 입고 벗기를 반복할 뿐이다. 기다림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든 현상의 발현지가 되고 그 모든 현상 속 인간은 기다림을 살아있음의 증표로 간직하게 된다. 고로 과거의 기억, 미래의 비전, 현재의 순간을 함께 포섭한 기다림을 삶의 전제이자 삶 그 자체로 보아도 무방하다.


   우리 모두는 삶이라는 하나의 기다림을 사는 동시에 각자의 인생만큼의 실제 하는 기다림의 가짓수를 더불어 살아낸다. 너와 나의 고유한 기다림들이 만나고 이별하며 또다시 돌아옴과 떠남을 기약하는 그 장소가 바로 터미널로 표현되는 인생의 축약본이다. 이방인 빅터가 내민 낯선 진심은 자신의 아버지, 아멜리아, 그리고 수많은 공항 직원들에게 기다림 본연의 의미, 곧 더불어 사는 인생의 행복을 깨닫게 해 준다.

   종점이자 연결점을 의미하는 단어 ‘Terminal’은 이미 완성된 인생이라는 행로가 ‘너와 나’의 순간들로 인해 반짝인다는 사실을 까마득한 기다림으로 말해주고 있다.


[The Terminal <터미널>, Steven Spielberg, 2004]

Casts: Tom Hanks, Catherine Zeta-Jones, Stanley Tucci, Diego Luna, Zoe Saldana, Kumar Pallana, and more.

Dream Works Pictures, August 27, 2004 (South Korea)  


2021년 4월 3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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