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은 형식이고, 남는 것은 서사다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20년 넘게 방송을 만들어온 PD가 집에 TV가 없다니, 누군가는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TV라는 ‘기기’를 중심으로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는다. 대신 손바닥 위의 모바일 화면으로 시청 패턴이 옮겨간 지 이미 오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본방사수!”라는 예고 멘트가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콘텐츠를 볼 수 있는 채널도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정해진 시간에 TV앞에서 방송을 기다릴 일은 이제 없다.
그렇다면, 방송을 만드는 PD 입장에서 이런 시대의 변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경쟁이 과열돼 생존이 더 어려워졌다고 한숨을 쉬어야 할까. 아니면 플랫폼이 다양해진 덕분에 더 많은 실험이 가능해졌다고 환영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면, 둘 다 맞다.
연차가 오래된 선배들은 두 자릿수 시청률을 비교적 쉽게 기록하던 시절을 종종 그리워한다. 그러나 많은 PD들은 지금의 환경에서 플랫폼을 넘나들며 새로운 형식을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 더 매력을 느낀다.
이제는 KBS PD가 KBS 프로그램만 만드는 시대가 아니다.
넷플릭스의 히트작 <피지컬 100>은 MBC에서 <PD수첩>을 만들던 장호기 PD가 기획했다. <도시어부>를 만든 장시원 PD 역시 JTBC를 거쳐 넷플릭스에서 프로그램을 론칭했고, 지금은 자신만의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다.
플랫폼과 채널의 경계는 이미 무너졌다. 시청자들은 이 콘텐츠가 지상파 방송에서 나왔는지, 종편인지, 유튜브인지 따지지 않는다. 재미있으면 보고 공감되면 공유할 뿐이다. 그렇게 콘텐츠는 이야깃거리가 되면 확산된다.
게다가 이제 콘텐츠는 방송 PD만의 영역도 아니다.
진용진, 빠니보틀, 곽튜브 등 유튜브와 OTT에는 이미 강력한 크리에이터들이 존재한다.
과거 높은 진입장벽으로 대단한 권력을 가졌던 방송은 이제 대중과 권한을 나눠 갖게 되었다.
당연히 더 건강한 구조다.
그 덕분에 시청자들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실험적인 콘텐츠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더 창의적이고, 더 정교하고, 더 재미있는 콘텐츠만이 선택받는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냉정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방송국 역시 매년 사업 성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린다. 미디어 업계는 전반적으로 살얼음판 위에 서 있다.
그 과정에서 PD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도 자연스럽게 좁아진다.
PD라고 해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만들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창작자이면서 동시에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말나 온 김에.
PD라는 직업은 좋은 점이 더 많을까, 아니면 힘든 점이 더 많을까.
단점부터 이야기해 보자.
직장인이라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저조한 시청률 앞에서 한숨도 쉰다. 촬영과 편집은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그래서 제작에 들어가면 ‘퇴근’이라는 단어는 잠시 잊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은 분명하다.
우선 ‘방송 PD’라는 직업은 제법 직업빨이 있다. TV는 여전히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는 분야다.
교양이든 예능이든, 어떤 형태로든 시청자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도 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장점은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매우 즐겁다는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을 취재하고, 관심 있는 주제를 영상으로 만들어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일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짜릿함을 준다.
지금도 많은 젊은이들이 PD를 꿈꾼다.
그들에게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방송국 PD가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그보다 중요한 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인간은 원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존재다.
플라톤이 말했다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이야기다.”라고.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도 인류가 거대한 문명을 가능하게 했던 힘을 ‘공유된 허구’, 즉 이야기에서 찾았다.
플랫폼은 바뀌고 채널은 사라지고 미디어 환경은 끝없이 재편되지만 이야기를 소비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은 변하지 않는다. 매체는 변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를 만드는 직업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형태를 바꾸며 더 넓어질 것이다.
PD를 꿈꾸는 이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하다.
"TV는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콘텐츠는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살아남는 것은 플랫폼이 아니라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