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ranta Storie] 신화를 통해 엿보는 문화지체현상
▲ 아폴로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에 언급되는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醫術)의 신이다. 그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승에서 각기 달리 이야기하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폴로와 테살로니카의 공주 코로니스 사이에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몸으로 태어났다.
그의 탄생에는 한 가지 남다른 점이 있다. 대개는 신의 아이를 밴 인간 여인이 신에게 버림 받는데, 그의 어머니 코로니스는 도리어 아폴로의 아이를 배고도 평범한 인간을 사랑했다. 아폴로는 전령 까마귀에게 코로니스가 인간 남자를 사랑한다는 전갈을 받고 불같이 화를 내며 죄 없는 까마귀를 저주한다. 본래 눈처럼 흰 아름다운 깃털을 갖고 길조의 상징이던 까마귀는 이 때부터 칠흑의 깃털을 갖고 흉조의 새가 됐다.
격노한 아폴로는 코로니스의 연인을 직접 활로 쏘아 죽인다. 하지만 사랑하던 여인 코로니스만큼은 차마 직접 쏠 수 없어 그의 누이인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대신 활을 쏴달라고 청한다. 코로니스가 죽자마자 아폴로는 격렬하게 뉘우치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불타는 장작 위에 놓은 코로니스의 몸에서 자기의 아이를 꺼낸다. 그가 바로 아스클레피오스다.
아폴로는 펠리온 산에 사는 키론에게 아스클레피오스를 맡긴다. 키론은 헤라클레스, 이아손, 아킬레우스와 같은 유명한 반신반인 영웅들을 가르친 반인반마 즉 센타우르스다. 아버지에게 이어받은 재능과 그리스신화 최고의 교사인 키론의 교육이 더해지면서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성장했다.
▲ 아폴로의 출신성분
그리스신화의 12신은 언뜻 모두 적통으로 올림푸스의 신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아폴로, 아프로디테(비너스), 아르테미스(다이아나)는 아나톨리아, 즉 지금의 터키 지역에서 모시던 신들로, 후에 그리스신화에 편입됐다고 한다. 학자들은 그리스가 해양진출을 통해 소아시아 해안지역에 무수히 식민도시를 건설하던 당시 그 지역 원주민들의 신화와 그리스 본토의 신화가 융합된 것이라고 믿는다.
소아시아 지역 신들을 제우스의 자녀로 묘사하는 건 훌륭한 융화 전략이었을 것이다. 소아시아의 신들과 그리스본토의 신들 사이에 부모-자식이라는 관계가 성립되면 친밀한 동시에 위계서열이 있다. 물론 소아시아 지역의 수많은 신들을 모두 제우스의 자녀로 묘사하는 과정에서 제우스는 자연스레 희대의 색마가 됐다.
하지만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당시에 제우스 식 난봉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부일처제가 확립된 것도 아니었고, 여자들은 신분상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혼인제도에도 약육강식이나 승자독식의 원칙이 적용됐을 것이다. 당시 제우스가 일상적으로 즐기던 약탈혼과 강간은 알파메일의 특권이었을 뿐이다.
보르포로스 해협 서쪽을 유럽으로 정의하자면, 당시 그리스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해양민족으로서 이집트나 미노아, 페니키아 등 선진문명을 수시로 접하고, 또한 야만족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세계유일'이나 '세계최초'의 선진문명이라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그리스인들이 당시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수많은 신기술들을 동쪽의 이민족들로부터 배웠다. 일례로 청동기시대는 페르시아 지역에서 기원전 3400년 이전에,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2800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지중해는 그들에게 세계의 전부였음에도 그들은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않았다. 지중해는 우물에 빗대기에 너무 컸다.
‘야만인(Babarian)’이라는 표현이 그리스어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그리스인들이 스스로를 최고라고 생각한 게 아닌가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야만인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그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사람(βάρβαρος)’이라는 의미일 뿐, ‘야만인(野蠻人)’이란 한자어가 주는 '세련되지 못함', '미개함'과 같은 어감은 그리스시대에 거의 없었다고 한다.
▲ 사랑 받지 못한 미남자 아폴로
아폴로가 관장하던 음악과 시, 궁술, 그리고 의학과 같은 ‘기술’들 상당수는 소아시아를 거쳐 그리스로 건너갔을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폴로가 그리스 본토에 속하는 테살로니카의 여인을 사랑했지만 그 여인이 다른 인간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폴로는 눈부신 미남으로 묘사되지만 신화를 보면 여인들에게 심지어 미소년(아네모네 설화)에게조차 자주 외면당한다. 좀 비약하자면 로켓기술이 사람을 달로 실어 나르는 놀라운 기술이나 먼지 한 톨만도 못한 우라늄에서 막대한 에너지를 얻어내는 꿈 같은 기술을 일반대중들이 이해하거나 사랑하기는 커녕 반문명운동부터 벌이는 것에 빗댈 수 있다. 사회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본토인들의 냉대는 일종의 문화지체현상처럼 보인다.
그런 아폴로와 그리스본토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스클레피오스는 뛰어난 의술로 많은 사람들을 구한다. 당시의 의학이 지금과 같이 과학적 방법론을 갖춘 것은 아니었으며, 주술적인 요소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고대그리스인들은 당시 다른 유럽 변방 여타 국가들에 비하면 훨씬 발전된 보건위생개념을 갖고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딸들 중 한 명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건강’이라는 의미이며 후에 영어에 와서 ‘위생’으로 의미가 축소 혹은 전이된 ‘히게이아(Hygeia, Ὑγεία)’이다.
▲ 신의 영역을 침범하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의술은 너무도 뛰어나서 마침내 삶과 죽음의 구분마저 모호하게 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의술로 인해 사람들이 죽지 않자 지하세계가 텅텅 비었다고 한다. 명계(冥界)의 왕 하데스가 아우인 제우스에게 불평하자 제우스가 번개를 던져 아스클레피오스를 죽인다.
또 다른 전승은 보다 더 의미심장하다. 아스클레피오스가 ‘많은 돈’을 받고 이미 죽은 사람을 살려냈기 때문에 신들의 노여움을 샀다는 것이다. 또는 그저 병을 고쳐준 ‘대가를’ 받았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도 한다.
고대인들은 병을 고치고 싶을 때 신전을 찾아갔다. 그들이 제사장이나 무녀에게 건네는 희생제물이나 돈은 신에게 바치는 것이지 인간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대가 받은 걸 책망한다는 것은 곧 당시 사람들의 눈에 의술이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즉 의술을 일종의 마술이나 주술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매우 낯익다. 무당에게 수백 만원을 주고 굿을 하는 사람들이, ‘보험처리를 해도 무려’ 3만원이 넘는 약을 처방했다고 의사를 욕하는 것과 흡사하다. 사람들에겐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음모론으로 엮어내는 재능이 있다. 의사들이 별 필요도 없는데 단지 제약회사에게 커미션을 받았기 때문에 비싼 약을 처방하고, 비싼 장비를 들였기 때문에 ‘본전을 뽑으려고’ 특정 시술이나 수술을 권한다는 생각은 그렇게 탄생한다. 물론 그런 의사가 세상에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 신의 분노, 인간의 분노
과거 ‘신’이라는 개념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된 개념이었다. 고대인들뿐 아니라 현대에도 인간들은 검증보다 합의를 더 중시한다.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어떤 것이 옳거나 실재한다는 것을 검증하는 게 무의미해진다. 대다수의 견해에 따라 옳고 그름, 혹은 참과 거짓을 결정하고 싶어한다. 여럿이 모여서 떼를 쓰면 위법도 합법이 된다. 여럿, 혹은 대다수의 뜻이 그게 곧 신의 뜻이었다.
그러니 이 신화 속의 제우스나 하데스는 진짜 신이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인들의 의식을 대변할 뿐이다. 아스클레피우스의 의술에 노한 것은 신이 아닌, 신기술에 저항하는 고대그리스 판 루다이트(luddites)들이었을 것이다. 인간들의 분노가 신의 분노처럼 둔갑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무속인들이 사실은 의뢰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고통의 원인을 그 조상신들에게서 찾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어떤 전승에든 아스클레피오스는 신들의 대표격인 제우스의 번개를 맞고 죽는다. 그의 아버지 아폴로는 격노했지만 제우스에게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그는 홧김에 에트나 화산 분화구 안에서 제우스의 명을 받들어 번개를 만드는 외눈박이거인 퀴큘롭스(cyclops)를 죽이곤, 제우스의 명에 따라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해 테살로니카의 왕 아드메투스 밑에서 한 동안 종살이를 한다.
이는 아폴로가 상징하는, 소아시아를 거쳐 도달한 신문명이 그리스에 정착하면서 많은 지체를 겪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아폴로가 종살이를 한 테살로니카 지역은 에게해를 두고 소아시아와 마주한 고대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럭저럭 그리스본토에 도착한 새로운 기술과 문명 혹은 종교가 사람들의 반발에 부딪혀 더 이상 퍼져가지 못하고 지체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잘 들어맞는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 고대그리스인들처럼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의식과 마음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간다. 급속한 기술발전이나 인간 인식의 틀을 벗어나는 첨단과학은 감각과 고정관념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큰 소외감을 안겨준다. 본래부터 집단의 일원으로 살아가게끔 뇌가 구성된 인간들에게 소외감이란 생각 이상으로 큰 고통이다. 보다 더 많은 정보가 주어지고 더 많은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됐는데도 우리 인간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속한 집단의 생각을 신의 뜻으로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각자가 속한 집단의 뜻이 중요하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상징하는 신문물과 올림푸스의 신들이 상징하는 고정관념이 충돌할 때 인간, 아니 그들이 모시는 신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낯선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우리를 후퇴시키는지.
2019년이 끝나갈 무렵 난데없이 찾아온 전염병은 인간들을 낱낱이 개인으로 흩어놓았다. 개인으로 살아가는 게 외로울 수는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리석은 집단의식이 공포로 변질되며 역사적으로 얼마나 여러 번 인간들을 진보로부터 뒷걸음치게 했는지 기억해야 한다. 인간들은 모일 때마다 큰 일을 이뤘거나 이룰 것 같이 착각한다. 뇌에서 분비되는 행복호르몬인 세로토닌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은 모일 때마다 위대한 일보단 어리석은 일을 더 많이 저질렀다. 몇몇 위대하고 담대한 군사작전을 제외하면, 위대한 발견과 깨달음은 대개 여럿이서보단 혼자서 얻어왔다.
현대과학과 기술에 집적된 인력이 필요한 것은 논외로 하자. 이 자가격리의 시절은 개개인이 각기 잠시 명상하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다. 어차피 우리는 인터넷 때문에 완전히 격리될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자가격리의 시절이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