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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베트 Dec 31. 2020

나는 왜 글을 쓰는가

프랑켄슈타인의 누더기를 짓는 아라크네 


이따금 나는 하루 종일 아마존이나 교보문고 같은 온라인 서점을 돌아다니며 혼자서 논다. 


남들은 무엇을 쓰는지, 무엇을 쓰고 싶어하는지 알고 싶어서다. 


내가 글을 정리해 올리기 시작한 브런치(brunch.co.kr)도 둘러본다. 


이따금 사춘기 청소년들 같은 자기중심적이고 협소한 세계관을 발견하곤 슬그머니 쓴웃음을 짓기도 하지만 비난하거나 비웃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떻게든 글 쓰는 게 정말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무언가 배설하듯, 수십 년 동안 내 머릿속에 두서없이 쌓인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과 달리 그런 사람들은 정말로 절박하게 무엇이라도 쓰려 한다. 


말 그대로 무엇이라도. 


마치 글을 쓰는 것이 그들의 존재가치라도 되는 양. 


육적인 생식을 포기한 한국인들이 유전자를 복제해 남기는 대신,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밈(meme)으로 남기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브런치 안에서만 해도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제목이나 내용의 글이 수백 편은 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글을 그렇게 설박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언제나 누군가에게 떠밀려 글을 썼다. 일기부터 교내 백일장 수상작까지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으면 쓰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글이란 그 장르와 무관하게 어떤 형태로든 '유익한'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짜리 계집애가 무얼 안다고 글을 쓰라고 하나 싶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일기든 독후감이든 거의 글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20년을 보냈다. 


나는 실제로 몸에 이상이 올 정도로 우울증과 불면증을 수십 년 동안 심하게 앓았다. 


아무 것도 쓰지 않으면서, 또 거의 읽지 않으면서. 


서른 다섯 살을 전후해서 어떤 사람이 온라인에 아무렇게나 갈긴 내 글을 보고 말했다. 


'너는 꼭 글을 써야 한다'고. 


그 사람이 유명소설가의 습작교실을 알려주었다. 


그 유명소설가 선생님이 말했다. 


'너는 꼭 글을 써야 한다'고. 


그러나 나는 무엇을 써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을 쓰라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책, 좋은 소설, 좋은 문학작품이 널렸는데, 그리고 그의 백 배, 천 배가 넘는 쓰레기 같은 작품이 널렸는데 내가 왜 거기 쓰레기 한 점을 보태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번 제대로 써보기도 전에 나는 그만 두었다. 


그렇게 또 십 년을 어영버영 보냈다. 


이따금 광고와 마케팅에 대해 글을 써야해서, 썼다. 


입만 열면 내게 '글은 아무나 쓰는 줄 알아?', '프랑스어는 아무나 배우는 줄 알아?', '그런 기사는 나도 시간만 나면 하루에 세 편은 쓴다'라고 하던 전남편과 정식으로 이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한국을 떠났다. 


어쩐 일인지, 한국어라고는 내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그래서 '구글 번역기'를 돌려 내 글 몇 편을 읽은 미국인 남편이 자꾸만 내게 글을 쓰라고 했다. 


나는 그저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러겠다고 했지만, 미국에 도착해서 1년 가까이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오십이 훌쩍 넘은 여자가 낯선 땅에서 낯선 언어로 살아가는 건 힘들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고단하고 맥이 빠졌다. 


내가 포기한 한국의 삶이 그립지도 않은데, 눈만 감으면 광화문과 세종로, 신문로의 출퇴근 길이, 군에 간 아들을 면회하느라 운전하던 시골길이 생생하게 보였다. 


아들이 보고 싶고 동생들이 보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세상 똑똑한 척 다 할 수 있던 내가, 이 곳에 와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정박아가 된 것 같아 우울했다. 


특히나 내가 아주 잘 아는 주제로 남들이 이야기할 때마다 단지 영어가 유창하지 못하단 이유로 그들 대화에 방해가 될까 싶어 입을 다물고 있자니 그렇게 답답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 생활에 아주 조금씩 익숙해지던 어느 날, 문득 나는 내가 페이스북 편집기로 무언가 쓰기 시작한 걸 깨달았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싸이고 싸였던 것들이 글이라는 형태로 넘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직도 이 세상에 쓰레기 한 점을 더 보태는 것 같아 이따금 망설인다. 


그래도 내가 멈추지 않는 건, 적어도 내 쓰레기는 남들 것과는 조금 다른 쓰레기라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똑같은 하나의 세계에 살면서도 각자의 시각과 관점, 살아온 인생, 각자가 갇혀 사는 육체에 따라 우리 모두는 다 다르게 세상을 보니 말이다. 


어차피 인간세계라는 건 한 줄의 간단한 수식으로 설명되는 우아하고 고상한 세계가 아니니까. 


인간의 인식이 파악할 수 있는 세계란, 각자가 갖고 있던 생각의 편린들을 한 조각씩 이어붙인 누더기, 잘 해봐야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같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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