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의 쓸모를 외치며 존재를 정당화하곤 한다.
내가 맡고 있는 일이나 해 나가는 일들, 할 줄 아는 일들을 힘 껏 들어깨우며 자신의 쓸모를 발하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쓸모가 아니다.
사실 당신이 어떤 자리에 있다면 그 자체로 당신의 쓸모는 입증되었다.
결혼을 했다면, 배우자에게 그 쓸모가 통했다는 것이고
취업을 했다면, 한 조직에서 그 쓸모를 택했다는 것이다
쓸모로 인해 그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 쓸모는 기본값이 된다.
문제는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불편한가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불편함에 있다.
존재자체로 불편한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한다.
잘 생각해 보면 쓸모가 없어져 버린다고 하는 대부분의 물건은 그 쓰임이 '불편' 해졌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힘을 가졌다며 망가지지도 않는다는 독일회사의 청소기를 비싼 가격을 주고 샀었다.
유용하게 사용하던 때도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불편해졌다.
큰 몸집을 보관하는 것도 불편,
매번 선을 연결하는 것도 불편,
큰 소음도 불편,
무거움도 불편,
심지어 망가지지 않는 것도 불편하다,,, 언제까지 써야 하지,,,
청소를 해 준다는 쓸모가 없어진 건 아니지만
잔뜩 불편함을 만났다.
결국 무료 나눔 당근거래 행이다.
단 돈 얼마라도 받아볼까 했지만, 역시나 무료 나눔에 잔뜩 같은 제품이 올라와 있다.
한때는 유용하고 쓸모 있던 사람이
어느 사인가 그 자리에서 존재 자체로 불편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많이 본다.
빼고 하자니 그것도 눈치가 보이고
함께 하자니 차라리 없는 게 편한 게 사실인 사람,
뭔가 하나를 물으면 많은 게 나오는 듯 하지만
묻는 순간부터 불편해져 사실 묻고 싶어지지 않는 사람,
인정과 칭찬의 표현은 적으면서도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을 때에는 날을 세우거나 토라져 버리는 사람,
쓸모를 무기 삼아 자리를 차고앉아
모두를 불편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차갑게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존재가 불편한 사람은
그 팀과 조직의 능률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조직문화를 하향평준화 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다.
스스로의 방어막과 타자에 대한 불만이 두터운 개인으로 자리하며
당근 하기도 어려운 사람이 된다.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가
보다
얼마나 부드럽게 어울리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