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되어 타고난 것으로 생각됩니다.
운명의 예를 들어보면 가장 기본적인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요소 들입니다.
지능, 기본 성격, 신체 특징 등 태어나면서부터 어느 정도 정해진 이러한 유전적 요소들은 우리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출생환경도 운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전쟁 중이거나 기아로 허덕이는 나라에 태어나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거나, 어떤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태어나는지 등 이러한 출생 환경들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이고 역시 우리 삶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입니다.
유전적 요소, 출생 환경 등은 우리가 이성적으로도 운명이라고 부르는데 큰 의문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내가 어떤 배우자를 만나고, 어떤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고,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 등은 결정론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에 쉽게 동의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의미는 이렇게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 경험의 영역까지 포함한 개념입니다.
불교에서는 각자의 심층의식인 아뢰야식에 우리의 현생의 업이 저장되고, 그것이 다음 생에 발현이 되어 윤회가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현생에서 하는 모든 생각, 말, 행동이 자신의 아뢰야식에 저장이 되어 다음 생의 씨앗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각자의 기억이 우리 삶의 바탕이고, 우리는 기억을 재료로 생각을 쌓고, 그 생각이 말이 되고, 행동이 되어 또 다른 삶의 흔적을 남긴다고 이야기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에고’라고 부르는 무의식이 절대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운전할 때도 매 순간 거의 우리가 인지 못하는 시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회사에서 퇴근해서 집까지 운전을 해온 기억을 되짚어 보면 거의 자유의지가 아닌 무의식적으로 운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의식은 ‘나’라는 존재의 거의 90%이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뢰야식과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일면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함께 감당해야 하는 ‘공동의 업’도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등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것들에 우리가 책임이 없는 게 아니고, 전체 인류가 감당해야 하는 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업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떤 시차를 두고 작용하는지 우리는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과의 법칙이 작용하지만 단순히 인과응보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닙니다. 개개의 존재들이 의식의 성장을 위해서 삶의 시나리오를 선택한다는 견해도 있고, 깨달은 존재인 ‘아라한’ ‘보살’ 이 되기를 서원해서 힘든 삶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 말, 행동이 앞으로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개인의 업(카르마),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 등 이러한 것들이 아마도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형성하는 재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운명과 같이 ‘정해진 것’도 있지만, 자유의지와 같이 ‘선택 가능한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인 양자역학에서는 운명을 고정된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가능성이 중첩되어 존재하다가 우리가 상호작용 하고 인식하는 순간에 하나의 상태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양자역학의 이론체계를 확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는 모든 가능성을 단지 확률로만 설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양자역학의 이러한 개념들이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 나오는 다중 세계(멀티버스의 세계)의 원리 이기도 합니다.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 중 관찰을 통해서, 상호 작용을 통해서, 특정 한 가지 세계로 귀결되어진다는 이론입니다.
또는 모든 가능한 결과가 각각 다른 세계에서 모두 일어나고, 우리는 그중 하나의 우주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무작위의 우연의 연속일까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은 정말 결정론적이지 않은가?’라는 의미로 ‘신은 정말 주사위 놀이를 하는가’라고 의문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운명과 같이 ‘정해진 것’과, 자유의지와 같이 ‘선택 가능한 것’이 우리 삶에 분명히 공존하고 있습니다.
‘정해진 것’에 대한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것을 해석해 내는 방식이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삶이라는 것은 ‘정해진 것’과 ‘선택 가능한 것’이 공존하며 의식이 성장하고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윤회의 개념을 받아들이더라도 왜 과거생의 기억은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과율이 작동한다고 봤을 때 과거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현재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을 안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되겠죠.
과거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태어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더 생생한 삶의 체험을 통해서 의식의 성장을 위한 개개 존재들의 선택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저는 과거생을 알고 풀어내는 현생이 답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생을 알고 난 후의 그 뻔한 답이 답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생의 기억을 가지지 않고 태어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펼쳐낼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명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완벽히 통제가능한 삶을 만들려는 에고의 생각에서 모든 게 운명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운명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운명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더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냥 결과를 믿고 내맡기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공기 없이 5분도 못 사는 한낱 인간 에고를 가지고 어떤 게 정답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큰 틀의 환경은 정해져 있어도 그 안에서 반응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어느 정도 정해진 길 위에 있어도, 어떤 마음으로 걷느냐에 따라서 고행이 될 수도 있고, 수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붓다는 정해진 운명도, 고정된 나도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개인의 업에 따라 일정한 경향성을 가질 수 있지만,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