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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해서 아름다운 행복

by 하늘담

행복한 상태는 무엇일까요?

매 순간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어디 가능이나 한 일인가요?

부정적인 생각을 덮어버리는 또 다른 관념으로 가득 채우는 가짜 긍정이 아니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의 매 순간이 행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저항, 무분별의 삶을 살아가려고 부단히 마음 챙김에 애를 써 보지만 다시 반추해 보면 내려놓는 게 아니라 또 다른 관념으로 가득 채워지기 일쑤입니다.

행복이라는 말이 가까이 있는 듯 하지만 다가가기 쉬운 상태는 아닌 듯합니다.


그럼, 잘 노는 것이 행복일까요?

놀이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재미를 얻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하는 활동을 말합니다. 물질적 보상 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행위이며 외부의 강제에 의한 행위도 아니라는 점에서 노동이나 일과 구별됩니다.

​놀이는 어떤 좋고 나쁨에 대한 분별이나, 타인과 나의 끊임없는 차별을 만들어 내는 에고놀이와 거리가 먼 가장 인간적인 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놀이의 목적이 명상을 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란 정의를 내린 것 중에 유희적 인간(Homo Ludens)으로 보는 관점에 동의합니다.

호모 루덴스 즉 유희적 인간이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때 행복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본래 단순하고, 따뜻하고, 서로를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릴 적 장난감을 가지고 깔깔 웃던 순간, 엄마의 품에서 잠들던 기억, 첫사랑의 설렘, 깊은 숲 속에서 청량한 공기 한숨을 들이쉴 때의 상쾌함, 누군가와 눈을 맞추며 마음이 통할 때 느꼈던 감정,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본성에 가까운 시간들이었고, 그 안에는 언제나 잔잔한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래도록 인간의 본성을 ‘억제해야 할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욕망은 죄악처럼 여겨졌고, 감정은 통제의 대상이 되었으며, 본능은 이성에 눌려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자신의 욕망을 숨기게 되었고, 타인의 기대에 맞추는 법을 배우며 자기 자신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서히 행복의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심지어 오래된 영적 전통이나 철학을 통해 ‘에고적 인간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감정은 흘려보내야 한다’ ‘육체는 진정한 내가 아니다’ 라는 가르침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데 익숙해지며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을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관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인간의 본성은 욕망과 집착이다라는 부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그러한 것을 잘 통제하는 것이 선의로 받아들이는데 기인한 것 같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식이고, 사건은 의식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왜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육체를 만들어 그 속에 의식을 가두고, 한정된 수명을 가지고, 타인과의 분별되는 존재라는 착각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을 세상에 내어 놓았을까요?

많은 영적 가르침은 이런 인간의 조건들을 ‘극복해야 할 것’이라 말합니다. 에고를 버려야 진리를 볼 수 있고,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 잘못된 것이라 여겨야만 할까요?

왜 인간적인 것은 의식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정의하고 죄악시되어야 할까요?

무엇인가 잘못된 믿음으로 우리를 스스로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요?


몸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를 안아줄 수 있고, 한정된 수명이라는 시간이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지고, 에고가 있기에 나와 너를 구별하여 다양한 하모니와 빛의 조합을 만들어 냅니다.

인간의 이러한 한계는 결핍이 아니라, 바로 존재를 빛나게 만드는 조건입니다.

감정이 있기에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가능합니다. 감정은 흘려보내고 무시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하고 느끼고 주의 깊게 들어야 하는 마음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유한하기에 이별을 통해서 사랑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행복은 바로 이 ‘인간’이라는 조건하에서 부족하면서도 사랑하고, 이해받지 못하면서로 이해하려 애쓸 수 있기에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요?

행복은 이렇게 가장 인간적일 때 우리의 작은 의식의 틈사이로 스며드는 게 아닐까요?


인간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고요하고 욕망 없는 완전한 경지로 종종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이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이 고통도 욕망도 없는 무미건조한 존재였을까요?

신은 인간이라는 불완전한 조건을 통해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경험을 갈망했을지 모릅니다.

행복은 모든 감정이 사라졌을 때 오는 무감각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울고, 후회하고, 다시 용서받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경험들 속에서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타인을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은 인간이라는 이 불완전한 형태 안에서 느끼는 다양함과 조화들에서 찾아오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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