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무아(無我)’, 즉 개별적 ‘나’가 없다고 말합니다.
반면 힌두교나 여러 가르침에서는 ‘아트만‘, 즉
개별적이고 순수한 영혼의 존재를 이야기하죠.
저도 불교에서 많은 통찰을 얻지만, 제 글들을 보면 불교에서는 부정하는 개별적 영혼의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엔 두 사상이 정반대로 느껴집니다.
하나는 ‘나란 없다’ 하고,
다른 하나는 ‘나란 존재한다’ 하니까요.
저 역시 오랫동안 그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둘은 사실 서로 어긋나 있지 않다는 걸요.
‘무아’는 단순히 “나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뜻의 깊은 곳에는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고, 홀로 설 수 없다”는 통찰이 있습니다.
이 말은 결국 ‘하나의 근원 의식’,
즉 분리될 수 없는 생명의 바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의식’은
스스로를 인식하기 위해 수많은 존재로 나뉘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의식의 한 조각,
즉 아트만이라 불리는 개별적 영혼의 형태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는 혼자서는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우주는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이라는
이분법적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안에서만 ‘나’와 ‘너’, ‘삶’과 ‘배움’이 생겨나니까요.
그러니 아트만은 잘못된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근원의식이 자신을 경험하기 위해 만든 창(窓) 입니다.
이 창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도, 슬픔도, 성장도, 깨달음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무아와 아트만, 이 두 진리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성시킵니다.
‘나는 없다’는 통찰 속에서
‘나는 곧 모든 것이다’라는 자각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자각을 살아내는 것이
인간으로서 우리가 맡은 가장 아름다운 체험입니다.
‘나는 없다’는 무아의 진리와
‘나는 근원의 일부다’라는 아트만의 진리,
이 두 가지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모순처럼 보이는 이 두 진리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 깊은 조화를 이해하게 됩니다.
진리는 언제나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모두가 참임을 깨닫는 자리에서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