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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미세뷰 Nov 29. 2020

혐오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누군가에게 혐오적인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는 사실이 싫어서 쓰는 글.

사실 요즘 힘들었다. 이러한 어조로 시작이라니, 그래도 내가 왜 브런치에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는지, 무엇 때문에 괴로워했는지 자신을 낱낱이 파헤쳐보며 반추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오랜만에 펜대 아니, 노트북 앞에 앉았다.


회사에 도는 나에 대한 소문을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이 말이 내내 걸렸던 모양이다. 내 머리로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도 이미 마음은 상처받아서 곪아 문드러지고 있었는데, 마음이 괜찮을 거라고 억지로 인정시키기 위하는 과정에서 받았을 스트레스를 겪은 나에게 미안하다. 이야기를 들은 뒤로 위 안쪽에 덩어리 진밥 한 덩이가 내려가지 않고 있는 듯했다. 체한 속처럼 내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었고, 계속하여 외면하려고 했지만, 결국 나를 드러내는 글을 써야 좀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 한밤중에 노트북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그 사람의 기분은 어떠할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기에 나 또한 무지했고, 세상의 모든 소수자를 외면했던 태도는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혐오라고 하기엔 너무 과도한 표현 같지만, 호의와 적의를 떠나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은 굉장히 성가시기에 일종의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는 점에서 나에 대해 떠드는 것을 혐오라고 여기기로 했다.


특히 Y 팀장이 나에 대한 평판을 회식 자리에서 떠드는 것을 듣고 나는 확신했다. 적어도 그것은 혐오의 일종이라고. 회사에서는 ‘특정’ 대학 출신의 ‘나’라는 존재가 꽤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흔히 말하는 담배를 피우며 노가리를 까는 타임에 의해 삽시간에 인사과에만 제출했던 내 신상정보가 퍼져나갈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소문의 근원지를 알기에 인사과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팀의 Y 팀장은 일은 안 하고 빈둥대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나름 젊은 감각의 옷차림에 속 시끄러운 언행도 없어 나름 인격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본질의 문제는 그가 한 언행에서 비롯되는데, 유독 내가 Y 팀장의 팀원이랑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Y 팀장은 인사과에 적힌 어떠한 특정 신상정보를 보고, 사석에서 나에 대한 혐오를 표했다. 바로 자신의 팀원에게 ‘친하게 지내지 말라, 친하게 지내면 나쁜 쪽으로 물들 수 있으니 되도록 놀지 말라고’ 대놓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건 뭐 유치원도 아니고 유치하시긴.)


이런 종류의 말은 난생처음이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했는데, 대학 진학 후 들어온 짬밥이 있어서인지 이러한 얘기도 생채기에 불과해 쉽게 아물 것으로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글을 쓰는 내내 심장이 아릿한 것이 나도 사람이긴 하구나, 나이를 먹어도 욕을 먹는 건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란 걸 지금에서야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이성적이고 웬만해서 상처도 안 받으며 이러한 욕은 수도 없이 들었다며 자부하며, Y 팀장의 팀원에게 사석에서 나를 어떻게 말했냐고 솔직하게 털어놔도 된다고 졸라서 들은 말이기에 나는 그 동료를 탓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자만했던 그때의 나 자신이 미울 뿐. 나쁜 쪽으로 말했음을 짐작했으면서도 부탁하고 애원하면서까지 왜 굳이 들으려 했는지 후회가 된다. 말해준 동료도 내가 이렇게 애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자책할 인물임을 알기에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건 언제나 힘들고, 사실이 아닌 것에 기반해 욕을 먹을 때면 이제 기분이 나쁜 것을 떠나 허탈한 감정까지 든다.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그들은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며, 내가 밉보이는 짓을 하나라도 하면 자기들의 기준에 결부 시켜, 결국 그럴 거였다면서 나를 욕할 테니 말이다.

아니, 이러한 상처 말고, 나는 언제까지 이러한 고독한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간 ‘그’ 학교 출신이라서 들은 편견에 의해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위축되었고 소심해졌다. 할 말도 못하게 되었고 남들의 눈치만 보며, 혹시 나의 행동이 어떠한 선입견을 줄까 최대한 조심하고 그들의 비위에 최선을 다해 맞추려 했고, 비굴해지는 나를 발견했다. 도대체 어떻게 어디까지 행동해야 그들의 혐오를 잠재울 수 있는지 최선을 다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언행에 문제가 있는 것을 깠으면 고치기라도 하지. Y 팀장과 나는 한마디 말도 섞지 않았는데 벌써 팀장들 사이와 담배 타임을 갖는 무리는 자기들끼리 이렇다 저렇다 할 이미지 프레임을 만들어 내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어떤 쪽으로 행동해도 애초에 그냥 ‘욕 받이’ 였다. 애초에 욕을 하고 싶었고 혐오스러운데 이유야 만들면 그뿐이지 그들에겐 원인 제공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애써 당면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과 마주하려 한다. 바로 그들이 나를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더 비굴해지기는 싫다. 사실이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다, 그렇다 당당하게 나서고 내 의견을 표출해야 한다고 나는 다짐했다.


저놈 저거, 결국 내 예상이 맞아 그럴 줄 알았다는 혐오의 표시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나신 분들께 내가 애써 숙이고 들어갈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그들이 나를 함부로 욕할 권리는 없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짚고 넘어가려 한다. 근거 없는 혐오를 받으며,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할 말은 하는 습관을 지니려고 한다.


그다음엔, 어떻게 하면 할지 차차 생각해 볼 요량이다. 사실 코로나 때문에 이런 고민도 털어놓을 곳이 없었는데 글을 쓰니 후련해졌다. 오랜만의 브런치에 이런 글이라니.. 마음을 더 추스르고 다음엔 더 따스하고 애틋한 글로 찾아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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