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노라면 괜스레 반가움을 느낀다. 더 많은 반가움을 느끼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그저 반짝이는 게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제부터인가 반짝이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마주하는 게 수 많은 욕심 중 하나다. 안타깝게도 인터넷이나 티브이에서만 나오는 하늘 가득한 밤하늘을 아직 마주한 기억은 없다. 내가 자란 시골에서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맞은 밤에도 양 떼를 이끄는 목동을 마주한 알프스에서도 말이다. 아 딱 한 번, 고등학교 기숙사 지붕에 누워 은하수를 본 기억은 있다. 욕심으로 자리 잡기 전에 마주한 흐릿한 은하수였지.
하늘엔 별이 가득해 서로가 닿을 만큼 가까워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머릿속으로는 계산하기 힘든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가깝게는 수십 광년에서 수천, 어쩌면 수만 광년씩 떨어진 그 사이는 아주아주 까맣고 또 차갑다고 한다. 우리는 그 사이를 가늠할 뿐이다. 막연한 거리가 체감보다는 개념이라는 표현으로 다가온다.
나와는 닿을 수 없는 그 막연한 거리를 넘어 존재하는 또 다른 별들과 우주가 서로 가까워 보인다. 그들끼리는 너무나 가까워 이미 닿은 듯해 보인다. 그래도 조금은 위로가 되는 사실이 있다. 그 존재들의 거리도 무지막지하게 멀어서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아무리 반짝이는 존재라고는 하지만, 체감조차 되지 않는 거리만큼 떨어진 그들이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울지도 모르겠다. 아니, 쓸쓸하고 외로울 거라 확신한다. 너무나 가까워 이미 닿은 듯해 보이지만, 그 사이를 건너 닿지 못하는 존재들의 외로운 마음이 안쓰러웠던 누군가가 별들이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별자리를 만들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깜깜한 하늘에 가득한 별을 마주하고 싶은 이유는 반짝이는 별에게 어쩌면 동질감을 느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꽤나 자주 마주한다. 남들보다는 조금은 이른 나이에 독립했던 옛 시간엔 항상 친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혈육의 공백을 메워준 존재들이었으나, 지금은 그들의 존재마저 간헐적으로 느끼는 상황이다. 혼자 와서 혼자 가는 게 사람이라지만, 내게는 별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체감되지 않는 표현이다. 그러다 보니 혼자 보내는 길고 긴 시간에서 외로움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어떤 모양의 외로움이든 그 녀석들은 너무나 시리다. 수많은 모양의 외로움을 마주했으면 익숙해질 만도 할 텐데 그러지 못했다. 너무나 시려서 몸이 아리다.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그저 얌전히 눈을 감고 몸을 웅크려 그 모든 외로움이 지나가기를 바라며 기다릴 뿐이고.
반짝이는 별들이 나보다 더 외로운 존재라 여기며 위로를 받는다는 건 정말 못난 태도지만 어쩌겠는가. 여전히 어리고 어리석은 누군가가 이젠 가만히 웅크리기도 싫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