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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바비앙 Jan 20. 2021

전하지 못한 말

추억


“나는  할머니가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거야”


큰 며느리가 딸 셋만 내리 낳았다고 엄마를 그렇게 구박하신 할머니였다. 엄마는 죄인도 아니면서 한마디 말도 않으신 채 그 말을 다 듣고만 사셨다.


할머니의 같은 레퍼토리가 지겨웠다.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옛날 사람이라 그렇다 쳐도 그렇지 어떻게 오실 때마다 그 말씀이 빠지질 않는지, 다른 이야기 하다가 자연스레 아들 못 낳은 큰 며느리 잡는 것으로 연결되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릴 적엔 내가 꼭 성공해서 아들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겠노라 다짐을 한 적도 있었다.




처음 할머니한테 대들기 시작한 게 고등학교 1학년쯤 되는 것 같다. 솔직히 할머니 소리는 하도 많이

들어서 별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매번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데  할머니한테 그만 하시라는 말 한마디 하신 적 없는 아빠가 미웠다. 할머니 말씀에 무언의 동조를 하시는 건지, 효자 코스프레하느라 그러시는 건지....

할머니의 구박을 다 들으면서 한마디 말대꾸도 없으신 엄마한테도 짜증이 났다. 그래서 일부러 더 발악 발악 대들었다. 엄마를 대변해 주는 거라는 생각에...

여름의 끝자락, 나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런 말 계속할 거면 그냥 오지 마!”



그래도 제일 큰 손녀라고 저한테는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말하는 싸가지 보라며, 지 에미 닮아서 못 됐다고 또 엄마를 헐뜯고 가셨다.

일주일 뒤가 할머니 생신인데 그날의 사건으로 기어코 집에 오시지 않으셨다. 아빠는 할머니한테 가서 잘못을 빌라고 하셨지만 나도  못된 구석이 있는지라 끝까지 잘못을 빌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냐며 되려 아빠한테 더 달려들었다.


그때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철저하게 할머니를 무시했다. 또 이상한 말을 하신다 싶으면 말없이 일어나 할머니 보따리를 챙겨 할머니 품에 안겨주고 나가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또 어떤 날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아들 얼굴 안 보고 살고 싶으면 또 그 소리 하라며 윽박질렀다. 아빠가 야단을 치셨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소리를 다 했다.


할머니가 그렇게 미웠던 건 비단 아들 타령 때문 만은 아니었다. 딸은 우리 집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작은 집도 딸만 둘이다. 그런데 여우 같은 작은 엄마는 어찌나 할머니 비위를 잘 맞췄는지 아들 못 나은

욕은 늘 우리 엄마 차지였다. 둘이 쿵작이 잘 맞는 것도 꼴 보기 싫었다.





돌아가시기 일 년 전 할머니가 대장암 판정을 받으셨다. 삶의 애착이 강했던 할머닌 아흔 하나의 연세에 수술받기를 원하셨다. 대장암 수술의 권위자가 부산의 대학병원에 있다는 소식까지 찾아내서 그쪽으로 가셨다.

작은 아버지가 부산에 살고 계셨다. 그곳에서 수술을 하셨으면 회복도 부산에서 하시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게 예뻐하는 작은 며느리도 거기 있는데  우리 집으로 오시겠단다. 아주 끝까지 엄마를 힘들게 못해서 안달이 났다 싶었다.

그 며느리는 고생시키는 게 싫으냐고 또 한바탕 난리를 쳤다. 큰 아들이 죄인 건지 내가 그 난리를 쳐도 결국엔 우리 집으로 오셨다.


아흔이 넘었다고 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정정하신 할머니였다. 수술 직후에도 암 수술한 노인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쌩쌩하셨는데 나이는 못 속이나 보다. 수술한 게 아까울 만큼 금방 재발을 했다. 길어야 6개월 이실 것 같다는 선고를 받으셨다. 본인은 수술했으니 100세는 거뜬하게 살 거라 호언장담하고 계시는데 말이다. 할머니께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왠지 할머니가 좀 짠하게 느껴졌다.


17세에 정신대에 끌려갈까 봐 서둘러 결혼을 했고, 곧바로 6.25가 터졌다. 핏덩이 아들 둘만 남겨두고 간 남편은 그 길로 평생을 볼 수없었다.

다 같이 힘들 시절이었지만 스무 살도 안 된 여자 혼자서 아이 둘을 키워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때 아빠 나이가 다섯 살이라고 했다.

모진 세월, 아들 둘 번듯하게 키워내느라 안 해 본 일 이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혼자 갖은 고생을 하며 보란 듯이 대학공부까지 다 시켜 놨으니 할머니로서는

기 어디 가서 기죽을 일이 없으셨던 것이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진 게 내 나이

마흔을 넘어서다.




노년의 환자는 하루가 다르게 병색이 짙어갔다. 엎친데 덮친다 했던가 아빠가 갑자기 병원으로 실려 가셨다. 집에 모셨던 할머니는 급하게 요양 병원으로 모셔야 했다.

엄마는 아빠 병원으로 , 나는 하루 두 번, 출 퇴근길에 할머니를 들여다보고 와야 했다.

아빠의 수술 스케줄은 빨리 잡히지 않았고, 할머니는 갈 때마다 기력이 점점 없어 보였다. 제발 아빠가 퇴원하시는 건 보고 가시라는 기도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도 사실 난 할머니에 대한 미움이 없어지지 않았었다. 큰 며느리 미워해서 마지막에 편하게 못 가는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아빠가 수술하신 다음날,

여느 때와 다르게 할머니의 정신이 너무나 또렷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리고는 재빨리 아빠와 작은 아빠께 전화를 돌려 통화를 하게 했다.

아들들한테 남긴 말은 “ 나 괜찮아!”였다.

그리고 아빠한테는  빨리 집에 오라고 하셨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새벽 요양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돌아가실 것 같으니 빨리 오라고, 바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울면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제발 아직 가지 말라고, 가도 아빠 오는 거 보고 가라고...

도착하니 모든 의료진이 할머니를 둘러싸고 있었다.

할머니한테 마지막 말을 전하라고 했다.


“할머니~ 아빠 수술 잘 된 거 알지? 아빠 집에 금방

올 거야. 그러니까 할머니도 버텨. 아들은 보고 가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엉엉 울었다. 눈이 감긴 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잠시 뒤 산소 호흡기가 떼어졌다.

할머니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거라던 나는

미친 여자 마냥 그날 하루 종일 엉엉 울었다.

생각해보니 할머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못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본인의 꽉 채운 아흔의

생일날이었다. 날씨도 어쩌면 그렇게 청명 할 수 있는지, 좋은 곳에 잘 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 같았다.


여태까지 살면서 크게 후회해 본 일이 없다.

그런데 할머니를 기분 좋게 맞이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그 시절이 이제 와서 이렇게 후회가 된다.

길가다 문득 할머니와 비슷한 스타일의 어르신을

보면 깜짝 놀라 발걸음이 멈춰진 게 몇 번인지 모르겠다.


‘ 아! 우리 할머니는 이제 안 계시지~’


다시 내딛는 발걸음 속에 이내 눈물이 흐른다.

그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그동안 쌓인 묵은 감정

다 털어내고 할머니한테 따뜻하게 웃는 모습 한번

보여드렸을 텐데 말이다.


TV에서 가수 주현미가 나온다. 우리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다. 주현미 나오는 거 보고 자야 한다며 꾸벅꾸벅 조는 할머니 눈을 두 손가락으로  벌리면서 웃었던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이 나는 밤이다.


할머니를 영원히 보내드리고 온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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