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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형 Aug 03. 2020

별상 - 머나먼 행성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지구의 하늘에는 SF가 빛나고 있다 01

이 중편을 접한 것은 일 년 전 이른 봄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김창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더 몇 년 전, 크로스로드 웹진에 실린 <망령 전쟁>을 접하면서였고, 다른 앤솔로지에 실린 <파수>를 보면서였다. 두 작품 모두 굉장히 인상이 깊어서 반드시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도서관에서 ≪우리가 추방된 세계≫라는 제목의 소설집을 발견했고,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며 작가의 팬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순서상으로는 그 뒤에 출간된 이 작가의 다른 소설집인 ≪삼사라≫ 에 실린 한 중편 소설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표지 이미지 출처 및 작품 소개(아작 출판사 홈페이지) : https://arzak.tistory.com/229


몇 달 전, 송지영 님과 함께 한국 SF로 감상평을 쓰기로 했을 때 떠오른 작품들은 수십 편이었는데, 며칠이 지나고 나니 유독 <별상>이라는 작품 이름이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떠다녔다. 아마 막 코로나바이러스 19가 유행하면서 전 지구를 점령 해갈 때였고, 책 제목이 가리키는 바이러스 이름인 '별상' 이 인터넷에서 본 코로나바이러스의 이미지와 자연스레 연결되어서였나 보다.


"사건의 발단은..." 
미셸의 얘기와 동시에 회의실 정면의 멀티 모니터에 알파 센타우리 제4행성의 평면도가 떠올랐다. 알파는 크게 세 개의 대륙으로 나뉘어 있었다. 각각 지구의 명칭을 빌어와서 뉴아세안, 뉴아메리카, 뉴아프리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중략)
"뉴아프리카의 철광 광산에서 시작됐습니다. 정확한 장소는 12번 광산 구역입니다." 
미셸이 시선을 돌려 청중들을 바라보았다.
"아시다시피 현재 우리 행성에서 채굴하고 있는 천연자원의 양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합니다. 반면에 이주가 시작된 지는 15년밖에 지나지 않았죠. 따라서 광산지역에 투입할 수 있는 무인 채굴 장비들의 수에는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장비를 인력이 대신하는 광산이 몇 군데 있는데, 이 12번이 그 중 하나입니다"   


책은 먼 미래, 인류가 알파 센타우리 제4행성을 두 번째 거처로 삼아 살고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80 여 만 명의 인류는 15년째 이 낯선 행성에서 생존을 위해 많은  시도를 하며 어렵사리 터전을 개척해왔다. 그런데 이때 전혀 새로운 바이러스가 발견된다. 우연히 땅속을 채굴하던 광부들에 의해 서식처가 개방된 이 바이러스는 다른 생물도 아닌 오직 하나의 종, 인간만을 선택해 48시간 이내에 죽음에 이르게 한다.  아무리 첨단 과학기술로 전염을 막거나 치료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아주 작은 필터를 통과하기 때문에 마스크도, 방호복도 소용없고 공기 접촉 만으로도 감염된다.  그리고 이 바이러스의 이름은 무서운 역신을 가리키는 한국어 '별상'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생물학이나 의학, 나노 의료학 등을 전문으로 하는 과학자, 연구자, 기술자들이다. 이들이 '알파'라고 불리는 이 행성 주민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이 소설의 전체 내용이다.

일 년 만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소설이 쓰인 연도를 다시 확인했다. 2005년, 김창규 작가가 수상과 함께 SF작가로 데뷔하게 된 작품이다. 중국발 사스가 발병한 것이 2003년이고, 인류는 역사에서 내내 페스트와 콜레라를 비롯해 에볼라, 사스, 메르스, 그리고 코로나 19까지 수많은 전염병에 시달려왔다. 다만 이 이야기가 미래에 지구가 아닌 곳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을 다룬 거라고 하면서도, 지금 2020년 상반기에 일어난 일들과 엄청나게 많은 장면이 겹친다. 

그리고 그 안에 지금 인간의 사회가 그대로 보여서 많이 놀라면서 다시 읽었다.

"알겠소. 이봐, 제임스"
의장이 손짓과 함께 회의실 벽으로 물러서 있던 비서를 불렀다. 비서는 재빨리 다가오며 전자수첩을 꺼내 손에 들었다."미셸 에드윈 박사의 권한을 임시에서 정규로 바꾸도록 하게. 이번 질병에 관한 전권을 주란 말이야. 단, 어느 정도 대책이 서기 전까지는 이번 일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대외비로 하도록 철저히 단속하게. 여러분들도 이 점 명심해 주시오. 알겠습니까? 사안이 위급하면 위급할수록 오히려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되오. 신속하게 대처하는 데에 방해될 소지는 모두 없애야 하니까. 알겠습니까?"


이 소설에서는 서로 다른 인물군의 뚜렷한 대립상이 가장 눈에 띈다.

과학자가 그중 핵심이지만, 제일 나중에 다루고 싶다. 이유는 그때 가서 같이 언급하고 싶다.


과학자와 대척점에 놓인 인물상은 크게 두 집단이다. 정치인과 종교인들이다.

정치인들은 사회의 큰 일, 심지어 이렇게 전염병 같은 비상사태가 터지면 구성원들의 생사를 좌우할 결정을 내릴 권력을 가졌고, 그로 인해 핵심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하고 활용할 특권이 있다. 이 소설에서는 재선을 노리는 욕심은 있으면서도 우유부단하고, 직접 발로 뛰거나 머리를 쥐어짤 능력도 의지도 없는 정치인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중보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죽음의 위협에서 제일 먼저 민중을 버리고 구조선에 올라타려는 작태를 부린다. 

"이건 여담입니다만...."
"네?"
"아이작 의장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습니까? 평소보다 호의적이라거나, 아니면 이런 종류의 사건에 적극적으로 도와주려고 한다거나."
"맞아요. 그랬던 것 같군요. 회의 진행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역시 바깥 소식에 어두우시군요. 아직 모르고 계신 걸 보니."
"무슨 얘기예요?"
"알파력으로 9개월 후에 새 의장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을 겁니다. 만약 이번 일이 신속하고 좋은 결과로 끝난다면 재선에 그만한 호재도 없겠죠."


 김창규 작가는 종종 일관된 신념도 없고, 책임도 지지 않는 가장 무능한 형태의 권력자들을 자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파수, 우리가 추방된 세계) 한편, 작가는 프로메테우스 저리 가라 싶은, 엄청난 책임으로 어깨가 무너질 정도의 정치지도자도 그린 적 있다. (망령 전쟁) 나는 제도 정치를 꾸준히 관측한 적도, 흥미도 별로 없지만, 이렇게 작품 안에서 마주치는 전형화된 권력자들을 볼 때면 있지도 않았던 '정치인'들에 대한 환상을 다시 들춰보고 점검하게 된다. 


종교인은 어떤가. 이들은 앞의 정치인들에 비하면 개인의 안위보다는 어떤 신념을 지키려는 일관된 의지는 가졌다. 하지만 신념에는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자신이 가진 신앙을 맹신(!)하고 그 렌즈로 세상을 보지만, 공동체를 지키려는 노력과 합리적인 모색에는 태클을 걸고 그저 그 믿음 한 가지를 최고 우선순위에 올려놓을 뿐 나머지는 모두 하찮은 것, 틀린 것으로 치부한다.  

"...별상은 인간만을 공격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그토록 다르길래 지금 알파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지구 출신 동물들은 무사하고 유독 인간만 급격한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보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너무도 명백하고 간단해서 간단한 초등교육을 받은 어린아이라도 그 진의를 금방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바로 지능을 가지고 환경을 변화시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의 치명적인 질병은? 바로 그런 특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임이 빠진 신념이 무서운 것은, 결국 그 신념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남을 공격하고 합리적인 결정과 합의, 그에 따른 이행마저 무산시키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른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도 과학도, 모두가 고민하고 헌신해서 내린 결정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종교가 때로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못 본 체하다가, 뜬금없이 소수자들의 인권을 짓밟거나 단순히 자신들과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참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 같다.

이 소설에서는 종교의 맹목과 근본주의의 폭력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 과학자 차례다. 바이러스와 대적하며 치료법이나 예방책, 혹은 전체 방역체계 전체를 설계하는, 이 작품 안의 과학자 혹은 기술자들은 특수성을 보이는 것 같다. 일단 가족이나 사적인인 상황을 고려할 여유가 전혀 없고 늘 지쳐있고 피곤하다. 그리고 늘 긴급한 사안이 밀려드는 통에 여유 있게 절차를 밟지도 못하고 늘 뛰어다니고 밥도 못 먹고 비밀을 다루느라 전전긍긍한다.  "재난물"이라고 불리는 콘텐츠에서 과학자들은 그렇다. 해결책을 찾으려고 분투하면서 맨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다. 낮밤이 없는 생활, 가족과의 생이별, 다른 욕망은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몰두 등... 물론 다른 이미지의 과학자가 등장하는 콘텐츠가 당연히 있지만, 거기서도 나는 대부분 외로움, 고립감, 첨단에 서서 수행하고 파악해 내야 하는 미지의 어떤 것에 대한 도전 같은 감정을 가장 많이 발견한 것 같다. (여성 과학자들이 나오는 해도연 작가의 '위그드라실의 여신들'이 그런 면에서 더 나눌 이야기가 많은 작품인데, 기회가 되면 여기서 소개하고 싶다)

“부르셨습니까, 소장님.” 
“자네가 나만큼 칼퇴근에 철저한 사람이 아니어서 다행이군. 자네 분명히 머릿속에 통신 모듈을 끼우고 있지?”
“네, 하지만 요새는 다들 쓰지 않나요?.”
“적어도 난 아냐. 우선 자네 집에 연락해서 앞으로 일주일 정도 출장을 나갈 거라고 알려줘. 그다음 부소장 앞으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연구소를 잘 돌아가게 지키라고 메시지를 남겨두고. 마지막으로, 철야 작업에 대비해서 자네 방에 준비해놨던 세면도구를 챙겨서 주차장으로 내려와. 내 차는 B-1 구역에 서 있으니까 거기로 오면 돼.”
이연석이 나가고 나자 미셸은 책상 의자에 앉아 뒤로 몸을 눕혔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밖에서는 회의에 참석했던 관계자들이 차를 몰아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병리학 자문위원을 맡고 알파에 도착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질병 발생으로 소집될 때마다 느꼈던 답답함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느낌이었다. 항상 똑같이 배치된 그녀 전용의 사무실까지도 그런 기억들을 지워버릴 수 없게 만드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소설 안에는 미셸과 이연석으로 대표되는 과학자 집단이 등장한다. 이들은 알파 제4행성의 인류를 구하기 위해 정말 일분일초 분투한다. 결국 DNA 변이라는 해결책(혹은 모험)을 찾아 시간과 경주를 한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인류를 살릴 백신인 "리빌더"를 싣고 바이러스 전파 속도를 이기기 위해 질주한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 몇 페이지는 액션과 서스펜스가 느껴져서 약간 입을 벌리고 읽게 된다. 


“소장님, 소장님 계세요?”
익숙한 마이너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조에는 위급함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야? 시간을 보니 예정대로라면 4차 수송팀까지 출발했을 텐데, 잘 돼 가고 있는 거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사람들이, 사람들이….”
마이너가 울고 있었다. 이연석은 등줄기로 섬뜩한 차가움이 흘러내려가며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울지 말고 침착하게 말해봐. 도대체 무슨 말이야.”
“사람들이 연구소를 습격했어요, 알파에서 보내줬던 경비 병력은 아무 힘도 못 쓰고 있고요. 저도 간신히 피해 나와서 연락하는 거예요.”

과학자들은 무얼 쫓아 살까? 과학자들은 왜 그렇게 해답을 찾기 위해 매달릴까? 과학은 어떤 종류의 가치체계이길래 다른 유형의 인간상으로 나타날까? 

SF에는 과학자가 중심인물로 나오고 그들의 삶이 가까이 조명되는 일이 잦다. (임성순 작가의 <우로보로스>에는 승진과 성공을 위해 연구 실적에 매달리는 과학자가 나온다.)

어떤 가치나 신념을 놓고 갈등하고 실천하고 책임 지고 헌신하는 인물상은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인공 감이다. 그게 종교인이냐, 청소년이냐, 과학자냐, 사업가냐, 연인이냐, 가족이냐에 따라 소설의 분류가 종교소설, 청소년 소설, 로맨스 소설, SF가 되는 것일까. (멋대로 장르 구분 기준을 떠올려본 거라, 정정될 기회가 올 거라 기대하며 썼다.) 

아무튼 과학과 먼 삶을 살아왔지만 과학 덕에 숨 쉬고 먹고살고 있다고 믿는 일인이라, 과학자라는 캐릭터는 꽤 오래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듯하다.


소설에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거기 당연하게 있는 또 다른 인물군은 대중, 민중이다. 전문가도, 권력자도, 지도자도 아닌, 결정의 '대상자'이자 희생과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이들. 사회를 구성하는 양적인 실체. 지금 내가 포함된 집단이다. 

대중은 전염병 발병의 희생자이기도 하고, 지금 코로나 19에서처럼 병을 확산시키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관리당하고, 구조되고, 치료되고 죽는 객체라는 뜻인데, 사람들이 그래서 코로나 19 같은 전염병이 생기면 무력감과 공포를 느끼는 것 아닐까. 

자연은 '당연한 사건이자 이치'이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파괴력과 살상력을 가진 자연이다.

이 앞에서 지식도 결정권도 없는 대상으로 관리될 때 불안과 공포는 당연한 것 같다. 이런 불안을 조금이라도 잠재우고 스스로를 관리하고 함께 생존을 도모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확한 정보를 취할 수 있는 권리, 모든 위험과 기회 앞에서 평등하다는 전제면 좀 더 생존과 공존이 가능할까? 


2020년 상반기가 이미 그렇지만 특히 하반기에는 아마 바이러스와 인간, 문명과 자연, 질병과 계급, 생존투쟁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놓고 들여다보고 되짚어보고 다시 질문하고 새 해석을 내놓는 일이 사회 각계에서 부지런히 일어날 것이다. 비과학자 입장에서  바라건대, 그런 새로운 분석과 해석의 목소리가 많이 풍성하고 획기적이었으면 좋겠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냥 잘 짜인 과학소설이구나 하면서 외적인 구성을 눈여겨본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지금 전 지구적인 전염병 시대에 다시 읽으니 질병과 전염병을 대하는 인간사회의 공포, 문화가 낳은 구조적인 모순과 함께 역학 전문가들의 매뉴얼과 절차가 일부 눈에 들어왔다.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피와 격리 등을 조치하는 한편  연구와 실험이 치열하게 되풀이된다. 이 소설 안에서는 정치구조가 허약하게 돌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실제로 정치 행정을 틀어쥔 공권력이 질병에 대처하는 면에서는 효과적이면서도 모두의 인간다움을 안전하게 배려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얼마나 무서운 폭력이 튀어나오는지, 소설뿐에서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확인하고 있다. 


<별상>에서는 테라포밍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기, 중력 같은 물리학적 환경을 비롯해, 물과 식량은 물론이고 생태학적 환경까지 지구와 다르지 않은 것이 없다. 정착 초기에는 지구에서 가져간 자원을 활용한다지만, 장기적으로는 새 행성에서 어떻게든 인류가 원하는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자체 수급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잘 적응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생존이 보장되면 그다음에는 버리고 싶지 않은 많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파에서 나름의 세력을 형성한 종교집단의 지도자가 노동자들이 힘들게 채굴한 광석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차고 있는 모습이 사치스럽기도 하고 이해가 가기도 했다. 

어쨌든 <별상>은 지구에서 인류가 당연한 듯 누리는 것들에 대해 낯설게 보게 된 계기였다. 



실제로는 2천 명이 아닐세. 이쪽도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았어. 보고 자료는 엉터리고, 실제로 만들어 낸 무결성 동면 장치는 820기에 불과했네. 거기엔 나를 포함해서 알파 위원회 각료와 개척지 자치 단체 지도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이 타게 될 거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잘 알겠습니다.”
“자, 어쩔 텐가? 지금 당장 나가서 파렴치한 정치인들이라고 언론에 퍼뜨릴 텐가?”
“아니요. 여기가 지구였다면, 그리고 이 일이 국지적인 것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할당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럼?”
“대신 거래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이 사실이 밖으로 새 나가게 되면 폭도들이 창망호가 그냥 출발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건 아시겠죠?”
“말해보게.”
아이작 의장은 지금 이연석이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협박이었다.
“가장 최근의 인구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17세부터 그 아래쪽으로 아이들의 명단을 뽑아주십시오. 그리고 그 아이들을 가능하면 모두 한곳에 모아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 정서를 다시 한번 절감한 측면은, 재난에 대응하는 인간 사회의 태도가 <별상>에도 고스란히 들어있었다는 점이다. 

바이러스가 행성에 퍼지기 시작하자 권력을 가진 이들은 제일 먼저 몇 대 안 남은 구조선을 타고 몰래 지구로 탈출하려 한다.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이 행성 주민들의 다른 목숨들보다 더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계급은 이렇게 단지 부나 정치적 권력 같은 자원 배분 차원을 넘어서, 생존율 자체를 처음부터 결정해둔다. 목숨 크기를 미리 정해두기 때문에 결정권을 가진 이들은 틈만 나면 다른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기 몸뚱이를 구한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역사 속에서, 영화에서,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겪는 재난의 현장들에서.  

김창규 작가는 그런 장면을 어떻게든 바꾸고 싶고, 다 같이 여리고 약한 목숨을 무사히 구조해내고 싶다는 열망을 자주 피력하는 소설가다. 작가가 쓴 다른 소설 <파수>가 그렇고 <망령 전쟁> <유일비>가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비롯해 많은 독자들이 가장 이 열망을 강하게 확인한 작품은 <우리가 추방된 세계> 일 것이다. 목숨의 값어치가 모두 같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 전제를 지키는, 그리고 나보다 너희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과학자와 시민들의 분투가 눈물겹다. 


“죽는 것은 사람이지 문명이 아니에요. 지금 알파에는 그동안 인류가 쌓아 올린 문화와 기술과 생존에 대한 기록이 고스란히 데이터베이스에 남아 있어요. 아이들은 거기서 배우고, 또 자랄 겁니다. 또 하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아이들만 남겨두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이번에는 미셸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아이들에게 리빌더를 모두 투입한 후, 현재 임신 중인 여성들도 가능한 한 모두 투입 대상에 넣을 생각이에요.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떠올리기엔 어렵지 않다. 김창규 작가는 단순한 낙관을 작품에 등장시키지 않는다. 실패와 상실은 그대로 일어나게 하고, 고통스러운 낙담이 일어난 후 어떤 것이 새로 등장하는 지 주목하라고 가리키는 것 같다. 세계가 사라진 것 같을 때 새로 어떤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지, 모든 신호가 절망만을 가리키고 있을 때 어느 쪽을 보고 걸어야 하는지. 이 작품 역시 예외가 아니다. 결말은 뻔하지만, 얕지 않다.


SF 소설은 현실에서 좀처럼 목격할 수 없는 장면들을 과학과 기술, 어떤 다른 전제가 작동하는 세계에서 보여주기 때문에, 잊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고 고민하게 하고 확신의 끈을 고쳐 매고 정비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다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돌아보게 된다. 아주 약하고 작은 인간이지만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느낌. 이것이 SF가 주는 경이감 중의 하나가 아닐까? 




2020년 상반기부터 SF 독자이자 팬인 송지영 & 김시형이 함께 SF 소설을 읽고 평균 한 달에 한편씩 감상/비평/리뷰를 올립니다. 둘다 자기만의 글쓰기를 꾸준히 하고 싶어 하는 데다 우리가 사랑하는 과학 픽션의 세계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기록하며 함께 공유하고 싶은 욕구가 가장 컸습니다. 혼자서는 못하는 기록의 작업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무척 기쁩니다. 

두 사람 다 한국 SF를 주로 읽는 팬이라서 당분간은 한국 작품들을 다룰 테지만, 점차 기회가 되면 외국어에서 번역된 작품도 포함시킬 생각입니다. 장편, 중편, 단편을 막론하고 읽고 다룰 생각이며, 또한 출판 소설이 아닌 매체 즉 웹툰, 만화, 영화 드라마 등의 영상물, 연극, 운문, 시나리오 등도 기회가 되면 읽고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좋은 소설과 작품을 추천하고 싶으신 동료 독자, 출판사, 콘텐츠제작자 등은 저희에게 연락 주세요! 함께 읽고 보고 느낀 다음 잘 소화해서 기록해보겠습니다. (toni@grb-agenc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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