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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탄 Aug 21. 2022

<12인의 성난 사람들> 밀실 속 민주주의의 명암

편견이라는 '킹리적 갓심'의 분쇄


흑백영화의 매력


남들이 나의 영화 취향을 물을 때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시간이 아까우니 평작은 건너뛰고, 대신 좋은 영화라면 무조건 챙겨본다고 대답한다. 그럼 좋은 영화란 뭐냐는 질문이 돌아오고, 그때는 '내가 감명 깊게 본 영화'라는 가불기로 얼버무리고 만다. 사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들에게 편견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만큼 여전히 손이 가지 않는 장르도 있다. 특히 로맨틱 코미디는 남들이 명작이라 말하지 않는 이상 찾아 보는 일이 별로 없다. 그것은 내가 생각해도 편견이다. 보지 않고서도 무작정 '재미없을 것 같다'는 편견.


사람인 이상 편견을 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니, 그 편견을 좀 더 넓히는 것 말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영화를 본격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던 몇 년 전부터는 명작들뿐 아니라 그저 그렇다 평가받는 영화들도 내 눈으로 보고 판단하기 위해 일부러 찾아보곤 한다. 그래도 근본적인 선호도는 영 바뀌지 않는 것 같다는 점에서 일명 '시네필' 수준에 도달하기엔 한참 멀었다고 생각한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고백하자면 그중에서도 가장 다가가기 어려웠던 게 흑백영화였다. 명암뿐인 화면 자체만으로 품격을 갖춘 듯하면서 고루하거나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앞서 나왔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명작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편견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중에도 이름만으로도 그 존재감이 뚜렷해지는 명작은 분명히 있다. 앞서 나왔다는 것 이상으로 뚜렷한 개성과 비전을 갖추어 후대의 모든 영화들에 영감을 준 영화들. 그중에서는 더 나아가 흑백이기 때문에 그 주제와 이야기, 예술성이 더욱 큰 힘을 얻게 되는 영화가 있다. 누구는 그것이 <카사블랑카>라 말하고, 누구는 그것이 <싸이코>라 말한다. 하지만 내게는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57년작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이 그런 영화다. 그리고 이것은 (비록 결은 다를지언정) 바로 그 편견에 대해 다루는 영화이기도 하다.


주연배우 헨리 폰다를 모르는 MZ세대라도 주인공 얼굴이 많이 익숙할 것이다. 티빙의 <신병> 드라마화로 한창 흥행몰이 중인 장삐쭈 유튜버의 <설문조사> 영상에 쓰인 그 영화이기 때문이다. 다만 개그 가득했던 영상과 달리 그 원본은 전혀 웃긴 영화가 아니다.


"자 손들어주시고요 오케이 하나 둘 석삼 너구리 오징어 육개장~"


편견과 의심


어느 더운 여름날의 뉴욕 시 법원, 아버지에 대한 18세 소년의 친족살인이 의심되는 사건을 두고, 판사는 재판의 향방을 법정에 참석한 열두 명의 배심원들에게 맡긴다. 배심원들은 전과 5범이라는 전적과 빈민가라는 출신 성분, 그리고 몇몇 증언을 두고 소년의 유죄가 명백하다고 말하며 배심 과정이 금방 끝날 거라 여기지만, 단 한 사람이 "유죄라고 보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무죄를 택한다. 11 대 1이라는 열세 속에서 시작된 토론은 차츰 사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환기시킨다. 의심을 해소하기 위한 교차검증들이 이어지면서 잠긴 배심원실 안은 수많은 격론의 향연장이 된다.


영화의 주 소재는 살인 사건이지만, 주인공들이 모두 배심원인 만큼 배심제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배심제는 영미법 역사에서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제도로, 사법체계의 오류를 막고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절차다. 우리나라에도 국민참여재판이란 이름의 배심원제가 2007년부터 자리잡기 시작했다.


영화의 배경인 미국의 배심제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남녀를 불문하고 범죄 경력이 없는 만 18세 이상의 모든 미국 국민은 법원으로부터 배심원으로 입장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법정에 출석해 배심 과정을 진행해야 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불참할 시 벌금, 나아가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 즉 배심은 민주시민으로 행해야 할 하나의 의무인 것이다. 이 작품은 대배심제와 소배심제 중 12인의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유무죄를 판가름하는 소배심, 우리말로 적절히 번역하면 평결(評決)배심제에 참석한 이들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초반에 배심원들이 유죄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이 지닌 편견이다. 소년 개인보다 소년이 속한 집단에 대한 편견, 증인의 말은 무조건 옳을 것이라는 편견, 법조인들은 자신들보다 똑똑하다는 편견이다. 하나의 개념에 천착한 채 다른 무언가에 대해 지레짐작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다. 의심은 있어도 근거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사실여부에는 관심 없이 하루빨리 사건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배심을 끝내는 가장 빠른 방법인 다수의견에 묻어가는 안일한 모습도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면 만장일치라는 제한에도 불구하고 비전문인들이 모여 도출하는 결론이 얼마나 얄팍하고 위험해질 수 있는지 느끼게 된다. 배심원의 무작위 선정이라는 점은 사실 양날의 검이다. 이들은 법조인도 사건의 증인도 자문도 아니며, 이 작품 속에서처럼 노동자와 증권 중개인, 건축가와 사업가 등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 살아온 환경도, 배운 것도 전부 다른 사람들이 민주적 절차를 따라 하나의 의견을 도출해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상론이다.


이 영화 초반에서처럼 검사와 변호사의 변론 대결에서 어느 쪽이 우위에 서느냐에 따라 비전문가인 배심원들의 의견은 자연히 그쪽으로 쏠리기 마련이다.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8번 배심원(헨리 폰다 扮)처럼 약자에 대한 휴머니즘과 명확한 논리로 무장한 존재가 끼어 있지 않은 이상, 배심제를 통해 판결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는 있어도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하기란 어렵다. 즉 <12인의 성난 사람들>의 내용은 사실 영화니까 가능한 얘기일 수도 있다.


(*이하 결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왕 가공의 이야기인 이상, 영화는 스스로 배심제의 허점을 짚는 동시에 8번 배심원을 통해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의 중요성 또한 강력하게 환기시킨다. 8번 배심원은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모든 것, 즉 피고인, 정황 증거, 재판 과정, 심지어 그걸 바라보고 있던 자기 자신의 사고방식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까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방과의 대화와 설득을 통해 풀어내려 한다. 물론 그 역시 수사관이 아니라 건축가일 뿐이니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명백한 한계가 있겠지만, 최소한 불명확한 집단 심리에 의한 의심이 아닌 구체적인 근거를 통한 토론으로 편견을 타파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도출된 합리적 의심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힘입어 판결을 바꿀 수 있다. 그 모든 허점 속에서도 개인들이 가진 고유의 이성이 전혀 다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민주제도에 대한 경계와 예찬이 동시에 담겨 있는 것이다. 설령 소년이 진짜 죄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한 명의 무고한 이에게 벌을 내리는 것보다 100명의 범죄자를 풀어주는 게 낫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정말 날 죽이겠다는 뜻은 아니겠죠?"

햇수로 6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생한 괴력을 자랑하는 이 영화의 각본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법정물이 아니라 일반적인 영화로서도 캐릭터 구성과 전개 모두 모범적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무죄라 단정하기보다, 그저 확답을 내릴 수 없다는 마음으로 시작된 대화가 편견에 갇혀 있던 다른 배심원들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 간다는 것은 주제에 부합할 뿐 아니라 그 과정만으로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충분하다.  


연극을 상정한 영화답게 몇몇 인물들의 변화 과정도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소년과 마찬가지로 빈민가 출신이라 배심에 소극적으로 임했던 5번은 시간이 지날수록 목소리를 키워 당당하게 의견을 표출하며, 세일즈맨으로서 여유와 재기가 넘쳤던 12번은 찬반 동률을 이루자 오락가락하기 시작한다. 배심 과정 내내 목소리만 키우며 주변을 이기려 들던 10번은 주변의 의도적인 무관심에 완전히 의지를 잃어버린다. 논리 정연한 언변을 구사하며 더위를 타지 않는다고 자신만만하던 4번은 역지사지를 논하는 8번의 질문 앞에 비로소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린다.

 

배심 과정이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 중 하나는 6 대 6, 즉 동률의 상황에서 무죄의 주창자인 8번과 유죄를 고수하는 3번의 대립이 화면으로 표출되는 순간이다. 그간의 대립을 시각화하듯 정말 칼로 찌르기라도 할 듯한 잠시의 서스펜스 이후, 소년처럼 빈민가 출신인 5번 배심원의 잭나이프 기술 재연으로 범죄 혐의가 옅어진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것은 6 대 6에서 7 대 5라는, 역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유무죄 입증에는 관심 없고 나가서 야구 경기나 보고 싶어 했던 7번 배심원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논증 없이 그저 귀찮다는 이유로 입장을 바꾸는 것 역시, 배심원들이 내린 결론도 결코 모든 면에서는 완벽하지 않다는 점을 영화 스스로 드러내고자 함이다.

 

인물의 미장센


그런데 한편으로 이 밀실 속의 이야기를 되짚을 때 진정으로 탄복해야 할 것은 바로 미장센 부분이다. 처음과 끝부분을 제외하면 영화는 대부분의 러닝타임 동안 배심원실 안에서 진행된다. 8번 배심원의 말처럼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니 관객 입장에서는 배심원들의 의사결정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작은 공간을 배경으로 한 화면의 밀도와 구성은 실로 대단한 수준이다.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연극화와 리메이크가 이어져 오고 있는 이유가 단순히 각본의 논리정연함에만 있지는 않다는 소리다.


주제의식과 흐름을 인지한 상태에서 영화의 화면을 차근차근 뜯어보면, 배심원 1번부터 12번까지의 자리 배치부터가 굉장히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단어가 본디 연극무대에서 '무대 배치'라는 뜻으로 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영화의 미장센은 사물 대신 인간의 배치에 공을 들임으로서 흠 잡을 데 없는 전개에 일조하고 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 좌석배치도


1번의 위치부터 보자.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배심원장으로서 가장 높은 자리인 상석이어야 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연출된다. 그러나 그는 문에 가까운 자리, 즉 말석이나 다름없는 곳에 앉아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직접 일어나 문을 열고 닫는다. 한편으로 본인 역시 배심원인데도 의견을 표출하지 않고 중재자에 가까운 행동을 반복한다. 그럼 7번이 반대편 끝자리에 앉아 있으니 이 사람이 상석인가 싶지만, 상술했듯 그는 등장인물 중 재판에 가장 관심이 없고, 수시로 자리를 왔다 갔다 한다. 우습게도 그의 뒤에는 화장실 문이 있다. 즉 이 장면부터가 민주절차의 기본인 평등함과 허점인 무관심을 드러내는 장치인 것이다.


한편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개진한 8번은 바로 옆, 그러니까 배심원장의 자리를 상석이라 가정한다면 관심을 가장 덜 받는 말석에 앉아 있다. 혼자라는 압박 이상으로 주변인들의 시선을 권위적으로 느끼게 한다. 반대로 책상을 가로로 둔다면 중심이 되는 것은 3번과 4번, 10번이다. 언쟁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은 긴 책상의 중앙부를 차지하여 실권자의 느낌을 주고 마지막까지 유죄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8번의 논리적인 반박에 따라 주변인들이 마음을 바꿔가는 모습은 시각적으로도 세력이 전복되는 느낌을 자아내고, 1번 근처의 2번과 11, 12번이 의견을 바꾸는 모습은 영화의 결말을 암시한다. 여기에 점차 더워지는 날씨와 6 대 6 상황에서 내리는 비는 인물들의 격렬한 고뇌와 논쟁의 심리를 대변한다.


영화는 짧은 순간에도 작품에서 발화(發話)하는 사람들이 오롯이 화면 안에 드러나도록 함으로써 개인의 작은 의견 하나라도 결코 묵살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다종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안건에 집중할 때도 카메라는 그들의 얼굴을 사람과 사람이 만든 또 하나의 프레임 속에 오밀조밀하게 담아낸다(당장 위의 범죄 재현 장면을 보자). 물론 이는 카메라 속에 비칠 자신의 위치를 빠짐없이 체크해 가며 연기한 배우들의 호연과, 60여 년 전 작품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련된 편집과 차분한 롱테이크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논쟁을 이어가는 인물들의 움직임이 또 하나의 미장센을 만든다.


진실엔 흑도 백도 없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좋았던 것은 8번 배심원을 통해 합리성과 냉정함으로 극의 흐름을 지배하다가 결말에서는 배심원들 모두에게 경의와 동정이 섞인 시선을 보낸다는 것이다. 밉상으로 보이던 10번이 고개를 내리깔아 무관심의 아픔을 절절히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고, 사실상 영화의 핵심 반동 인물이었던 3번 배심원이 무너진 가운데서도 8번 배심원의 손은 이해한다는 듯 겉옷을 입혀 준다. 영화의 마지막은 법원 건물을 벗어나 자신의 일터 혹은 집으로 돌아가는 배심원들의 모습을 비추는데, 3번 배심원이 맨 마지막에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 나오고서야 비로소 엔딩 크레딧이 뜬다. 아무 연고 없는 사람의 죄를 벗겨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 이들에게 고른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이 영화가 나온 1957년은 이미 컬러영화가 대세화되고 있던 시절이다. <전쟁과 평화>, <십계> 등 화려한 색감을 뽐내는 대규모 스케일의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흑백 화면은 주로 무거운 사회문제를 다루거나 어두운 스릴러, 예술성이 짙은 영화들 쪽으로 국한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인간의 명과 암을 뚜렷히 드려내면서, 세상에 선악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화면 때문인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흑백영화 속에는 페이드 인-아웃 신을 제외하면 완벽한 흑색도 완벽한 백색도 없지 않은가. 명암이 깊고 옅은 회색들이 이미지를 만든다. 무엇이라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진실과, 누가 좋다 누가 나쁘다 말할 수 없는 등장인물들 모두를 90분 동안 꽉 채워 그려내는 데 회색빛 화면은 더없이 적절하다.


더군다나 개봉 당시엔 공산주의자에 대한 정치병, 매카시즘이란 광풍이 할리우드를 몰아치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에 대한 이해와 무죄추정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관용이 결여된 당대 사회를 배심원들의 모습으로 압축하고, 이들이 변화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란 어때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의심병보다는 맹목적 확신이 언제나 더 위험하다고 믿고 있다. 무언가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확신하다가도, 의문스러운 점이 하나 생기면 그것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곤 한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반박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진정한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자신이 믿고 싶었던 사실의 연장선일 수도, 진실인데도 자신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불특정 다수의 경우 진실을 찾기 위한 과정은 오히려 쉬워진다. 다수가 공통으로 지닌 편견이 작용할 때가 그렇다. '집단의 느낌'이라는 이유로 그 편견은 힘을 가지게 된다. 근거가 없다면 그것은 합리적 의심이 아니다. 물론 편견은 없앤다고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갖고 있다고 불법인 것도 아니다. 사회의 명문화되지 않은 도덕규범을 세우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다수결과 만장일치제는 민주주의의 뚜렷한 빛인 동시에 짙은 그림자가 될 수 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법정의 오류와 편견으로 생겨난 유죄를 합리적 토론을 통해 무죄로 바꾸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보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민주주의의 승리에 대한 예찬처럼 보여도,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잡음들을 통해 민주주의의 한계 역시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고 있다. 또한 주변에 도사린 편견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지만, 그 부족한 개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도달한 결론으로 한 사람을 살리는 모습은 시드니 루멧 감독 특유의 휴머니즘으로 가득하다. 65년의 시간을 넘어서도, 여전히 걸작이다.



+ 이 영화는 현재 미국 기준으로 저작권이 만료되어 유튜브에서도 무료로 볼 수 있다. 언제 봐도 정말 재미있는 영화이니 안 본 눈이라면 이참에 본 눈이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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