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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탄 Dec 25. 2022

<아바타: 물의 길> 거장의 야심은 끝이 없다


끝판왕의 귀환


일전에 잠시 언급한 적 있지만, 나는 부모님, 특히 아버지를 통해 영화의 세계로 들어섰다. 한때 어엿한 극장 운영 경험까지 있는 아버지의 영화 선택은 거의 틀리는 법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서 봤던 영화들이 인생영화로 남아 있는 것은, 비단 어린아이의 덜 여문 머릿속에 충격으로 다가와서만은 아니다. 세월이 지나 보아도 고유의 압도적인 마력을 지닌, 모두가 극장에서 볼 수 있어 행운이었던 명작들인 덕이다.


지금은 티켓값이 오를 대로 오른데다 '요즘에는 재미있는 영화가 없다'라는 이유로 아버지는 영화 감상이라는 취미를 다소 줄이셨고, 가끔 극장에서 볼 영화를 선택하는 것도 아들에게 떠넘겨 버리셨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도 이름을 듣자마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온 가족의 극장행을 결정하고 기대감으로 들끓게 만드는 인물들이 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세 명만 꼽아보면 아마 톰 크루즈, 봉준호, 그리고 제임스 카메론일 것이다.


세계 제일의 영화 흥행사라는 타이틀을 제하더라도 제임스 카메론의 이름은 내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텔레비전에서 매년 명절마다 틀어주던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을 통해 '아, 영화는 수십 수백 번 넘게 봐도 재미있을 수 있구나'라는 가성비 최악의 감상관(?)을 처음으로 심어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들은 스토리부터 영상미까지, 기존의 기술에 천착하는 블록버스터와 달리 늘 새로운 도전의 결과물이었고, 상업영화의 형식으로도 영상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들이었다. 어머니를 몇 번이고 울린 <타이타닉> 이후 12년 만에 들고 온 <아바타>를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비교적 평이한 스토리였음에도 눈을 의심케 할 정도의 혁명적인 영상미를 펼쳐냈기에 다시 한 번 그 이름이 가진 저력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12년하고 1년이라는 장고의 세월 뒤, 카메론은 드디어 후속편 <아바타: 물의 길>을 들고 왔다. 나는 온 가족의 단체관람을 2회차 감상으로 미루는 불효를 감수하고서라도,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개봉 당일에 극장으로 달려가서 끝판왕을 영접하는 느낌으로 영화를 보았다. 그런데 긴 상영시간이 지난 후, 이번에는 그의 영화들에서 느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어딘가 찝찝하고 갸우뚱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영화 한 편에 큰 감흥을 느끼기에는 나이가 들어서일까, 그간 봐왔던 눈 돌아가는 영화들 때문에 쓸데없이 보는 눈이 높아져서였을까, 아니면 영화가 기대를 채워주지 못해서였을까.


물론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던 부분도 많고, 그것들이 오로지 극장에서만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나는 가족들과 기꺼이 재감상을 할 생각이다. <아바타: 물의 길>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비주얼적인 면에서만큼은 신비로울 만큼의 성취를 이룬 작품이다. 바다와 관련된 카메론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관객에게 보다 가까이 공유하고픈 노력의 산물처럼 느껴지고, 개개인의 감상평이 어떻든, 체험의 수준에 올라와 있는 극소수의 영화 중 하나다. 이를 극장, 그중에서도 높은 스펙을 갖춘 극장에서 관람해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간의 평가처럼 극장의 위상을 묵직하게 되세우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내려가길 기다렸다가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본다는 건, 영화팬 한정으로 죄악에 가까운 짓이다.


그럼에도 섭섭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비주얼의 언어로 말하는 주제


13년의 시간 동안 전작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수많은 영화 CG들을 접해 왔음에도, (특히 바다라는 같은 배경을 공유하는 <아쿠아맨>에서 장대한 스케일의 해양 액션을 한 번 맛보았음에도) <아바타: 물의 길>의 CG는 독보적이다. 이유는 단지 전작처럼 오색창연한 비주얼을 물량공세로 퍼붓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이 되는 수면과 이를 넘나드는 생물의 질감 표현에 있다. 파도와 수포, 물방울에 굴절되는 빛, CG로 만들어진 동물과 인물의 피부에 스며드는 물기 하나하나에서 청량함과 축축함이 와닿을 정도다. 그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영화 속 CG가 교묘하게 기피해 왔던 물의 질감 표현을 정공법으로 돌파함으로써, 영화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여타 블록버스터들보다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자리하고 있다. 제임스 카메론이 영화 제작을 빙자해 판도라에 가서 실사 장면을 찍은 다음 관객에게 CG라고 사기를 친다는 농담은, 극장에서 확인한 뒤에는 더 이상 농담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이 CG를 더욱 깊게 만드는 것은 파란색이라는 색채의 표현이다. 생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색이자 동시에 생명체에게서 가장 드러나기 어려운 모순적인 색이면서, 제임스 카메론의 필모그래피에서는 그만의 인장이나 다름없는 색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어비스>와 <타이타닉>뿐 아니라 <터미네이터> 시리즈와 <에일리언 2> 속에서도 파란색은 언제나 두드러졌다. 뒤의 작품에서 SF물의 공간감과 기술의 공포를 서늘하게 표현하였다면, 이 영화의 파란색은 나비족의 피부색이 주는 기이함뿐만 아니라 보다 폭넓은 자연적 생명력과 신비를 조명하는 데 집중한다. 영화는 천해의 코발트블루부터 심해의 인디고블루를 넘나들며, 해양생물들의 숫자만큼이나 깊고 다채로운 색채를 뿜어낸다. 또한 파란색은 시간을 실제보다 느리게 체감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바다라는 한정된 공간과 192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에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감상을 보면, 이 역시 흥행사로서의 대중적인 감각이 누구보다도 발달한 감독의 노림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색감과 질감의 극대화를 통해 만든 물이라는 비주얼의 언어로 영화가 말하는 주제는 사실 전작과 동일하다. 자연에 대한 애정과 찬미, 그리고 이를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기계문명에 대한 비판은 보다 깊고 날카로워졌다. 이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 자신이 스스로 말했듯이 지구의 보고이자 근원인 바다에 적잖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타닉 촬영을 위해 심해 전문가가 되고, 포경업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찍고, 1인승 잠수정을 타고 심해 잠수 신기록을 세움으로써 나사 자문까지 되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한 지식이 바탕이 된 것인지, 판도라의 해양 생태계는 전작보다 조금 더 현실의 지구와 닮은 구석이 많도록 조성되어 있다. 비주얼이 그리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평을 뒤집어보면, 판도라의 바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바다를 더욱 가까이 투영한 결과물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가공의 공간에서 체감하는 유사성은 관객에게 핍진성을 선사하고, 우리가 사는 실제 세계의 보호라는 주제를 피부에 물기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영상기술을 그저 뽐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와 주제를 탄탄하게 뒷받침했던 그의 이전작들과 비교해도 단연 돋보이는 성취이다.



특히 판도라의 고래인 '툴쿤'을 그저 동물이 아니라 문화와 전쟁이라는 고등 개념과 종족간의 의사소통능력까지 지닌 지적 종족으로 그려낸 점이 흥미롭다. 형상도 생태도 다른 해양생물 객체를 카메라의 새로운 눈이자 이야기의 또 다른 주체로 삼고, 툴쿤과 교감하는 로아크는 위에 올라타는 대신 바닷속에서 툴쿤과 동등한 시점에서 시선을 주고받으며 나란히 헤엄친다. 전작에서도 뉴런으로 이어져 있을지언정 이미지적으로는 상하관계의 느낌이 강했던 동물과 인간 사이의 교감을 보다 수평적인 미장센으로 표현하는 것은, 바다에 대한 감독의 애정과 겸허함을 진득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툴쿤들이 인간들의 함선을 피하다 사냥당하는 불온한 스펙터클 속에서도 시리즈의 테마는 더욱 깊고 견고해진다.


툴쿤의 존재는 인간 중심의 관점을 비판하는 생태주의의 표상일 뿐 아니라, 범신론과 유일신교가 결합된 나비족의 세계관 속에 기이한 파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에이와'라는 나비의 집단의식이자 대지모신격에 대한 숭배 의식은 본작에서도 적잖은 비중을 지니며, 등장인물 중 키리의 존재는 탄생 배경과 능력으로 보아 에이와의 대리자, 혹은 화신으로 점찍어지는 면모가 있다. 그런데 인간 형상의 나비족뿐 아니라 툴쿤이라는 동물상의 존재 또한 그와 비등한 지능과 문명을 가졌다. 이 점으로 미루어보면, 판도라의 다종족 세계관 속에서 에이와와 그 화신의 개념은 단순히 나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우영우 변호사는 특히 이 영화를 좋아할 거 같다.


전작의 결말에서, 제이크의 기도에 화답하듯 동물의 대군이 들이닥쳐 불리했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장면이 있다. 나비족의 입장에서는 에이와가 동물들에게 명령하여 자신들의 승리를 도왔다고 말할  있다. 그러나 이는 생태적 관점에서 보면 역시나 지극히 나비 중심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에이와는 생태계의 일부인 나비도 구제할 , 판도라 행성 전체의 안위를 위해 생태계 교란종인 인간을 응징하고자 수많은 화신으로서 나선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아바타'라는 제목의 원전이 된 힌두교도 범신론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힌두의 셀 수 없이 많은 신들 중에는 동물과 인간의 형상이 뒤섞인 신도 많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면 툴쿤도 작중에서 에이와의 또 다른 아바타일 수도 있다. 작중의 멧카이나 부족의 모티브가 되는 폴리네시아에서는 고래를 우상 숭배하는 문화가 도드라지기도 한다(로아크와 교감하는 툴쿤인 파야칸의 이름도 마오리어로 혹등고래 신격을 지칭하는 Paikea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전작의 엔딩을 곱씹어본다면, 에이와는 툴쿤뿐만 아니라 동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 화신으로 임하여, 공동의 의식이 이해의 저편에서 생태계의 질서와 조화를 맞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생태주의적/범신론적 관점에서는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수 없는 신격일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 역시 본작의 겸허한 감성과 자연친화적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니 만약 본작을 판도라의 해저 탐사, 혹은 가공의 전쟁‧문화사 다큐멘터리로 인식하고 관람한다면, 관객은 가공의 생태계와 문화를 흥미진진하게 체험하면서 환경에 대한 선명한 교훈도 얻어갈 수 있다. 문제는 관객들이 본작을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블록버스터 영화로서,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로서 기대했다는 것이다.


(* 이하 결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질과 양이 교차하는 액션과 이야기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에서 보였던 것은 경이적인 비주얼만큼이나 그것을 도구로 펼치는 천의무봉의 액션이었다. <아바타: 물의 길>의 액션을 한마디로 평하면, 명불허전이다. 다만 지상과 공중을 넘나들던 대규모 전면전을 보여준 전작에 비하면 본작의 스케일은 밀림의 소규모 접전과 추격전, 국지적인 해상 전투로 축소되었다. 대자본 블록버스터 특유의 거대함의 미학을 기대했던 팬들은 분명 아쉬워했을 듯싶다. 그러나 크기가 줄어든 대신 장력은 더욱 팽팽해졌다. 매 장면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고민하여 내놓은 연출은 정녕 카메론이 70대를 바라보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힘이 넘친다.


정통 호러물이었던 <에일리언>의 속편에 밀리터리 SF적 묘사를 듬뿍 넣어 보는 재미를 톡톡히 챙겼듯이, 이번 작품에서 등장하는 무기나 메카닉 개체들의 외양과 설정, 움직임은 더욱 다양하고 현실적이면서 택티컬한 감성이 가득하다. 후반부 1시간 동안 이들이 총출동하여 멧카이나 부족과 맞닥뜨리는 클라이맥스, 그리고 이어지는 주인공과 빌런 팀의 결투는 액션의 역동성과 속도감 넘치는 편집점, 음향의 디테일까지 실로 교과서적인 구성과 합을 보여주고 있다. <타이타닉>과 <터미네이터 2>의 셀프 오마주가 가득하지만, 단순히 본연의 스타일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액션 영화들에서의 장점을 흡수하여 체득한 느낌도 든다.



이렇게 액션 시퀀스를 기가 막히게 잘 찍는 감독이기는 하지만, 본래 카메론은 단순한 플롯과 적은 캐릭터만으로도 이야기에 풍부함과 깊이감을 낼 줄 아는 각본가이기도 했다. 데뷔작인 <터미네이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에일리언 2>부터 <타이타닉>까지, 그가 각본과 연출을 겸업하여 흥행시킨 영화들은 명확한 공통점을 가진다. 보편적인 대주제를 토대로 거대한 세계관과 설정을 디테일의 극한까지 구축한 다음, 거기에 순화되지 않는 소수의 캐릭터들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반항과 변혁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식이다. 이것은 오늘날 현대 블록버스터의 기본적인 성공 공식이나 다름없다.


카메론은 닳을 대로 닳은  작법을 <아바타>에서도 고집했다. 하지만 ‘아바타 프로그램이라는 메타적 설정과 이방인의 적응기에 혁신적인 3D 결합해, 시네마의 영역을 감상이 아닌 체험으로 확장해냈다. 그것이 <아바타> 'SF <늑대와 춤을>'이라 일컫는 고루한 비판에 무작정 동의할  없는 이유였다. 그런데 후속편인 <아바타: 물의 > 이야기를 되짚어보면, 그는 그간 자신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소수의 이야깃거리로 극한의 품질을 뽑아내던 각본의 기조와 정확히 반대되는 선택을 하고 있다. 액션의 품질이 더욱 날카로워진 반면, 캐릭터가  이야기는 너무나 많아  깊이가 얕아진 것이다.



우선 후속편에서 제이크가 나비의 삶을 고수하고 쿼리치도 인간의 몸으로 돌아갈  없는 리콤비넌트가  이상 '아바타 프로그램'이라는 설정은  의미가 없어졌다(상술했듯 '아바타'라는 단어는 다른 방향으로 의미를 확장하지만). 그래서 영화는  몰입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이방인의 적응기를 주인공과 악당을 비롯해  많은 등장인물에게 확장시키는  집중한다. 물론 캐릭터를 구축하는 배경 서사만을 보면, 변화를 조성하기 위한 카메론의 노력은 여실히 느껴진다. 기존 등장인물간의 구도도 가족이라는 테마를 통해 변곡하면서 환기를 꾀하고, 등장인물의 숫자와 개인이 품은 고민 또한 제각각이다. 제이크의 시선에서 일자적으로 진행되었던 모험 이야기는 모두가 이야기의  자리씩을 꿰찬 군상극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입체성은  편의 영화 속에 선보이는 순간 도리어 양날의 검이 된다. 풀어내야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새로운 캐릭터로 전작의 아성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하더라도, 그 정도가 지나치면 당연히 집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또한 후술할 미완의 각본 덕분에 192분이라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의 드라마적 연결성이 다소 성기다는 문제가 생긴다.  흠결이 있다기보다는, 잔가지를 이어붙이는 과정이 영화로 담기에 너무 길고 지난하다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대주제  하나는 상호간의 유대감이 가장 돋보여야 하는 가족애다.


로아크 | 스파이더 | 키리

'물의 길'에서 맴도는 가족 서사


영화의 주역인 제이크 부부의 자녀들부터 살펴보자. 서사적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둘째인 로아크다. 친아들이지만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최강의 해상 생물인 툴쿤과 홀로 교감하는 것으로 충돌을 빚다가 나중에는 그 교감에 힘입어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을 구해내며 인정을 받는다. 로아크의 행적 전체가 이방인에서 위대한 ‘토루크 막토’가 되었던 제이크의 과거 모습을 빼닮아 있다. 여기까지는 흠 잡을 구석이 없다.


문제는로아크의 성장을 위해 장자인 네테이얌이 일종의 희생물로서 소비된다는  있다. 네테이얌은 부부 사이의 첫째 자식인 만큼 가족애의 시작이라는 상징성이 있고, 구성상 드라마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인물이며 행동에도 모자람이 없다. 신체적 특징도  나비 본연의 모습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중간 서사는 지극히 평면적이고,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는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에서 퇴장하는 순간이다. 영화 시작부터 죽은  등장했던  토미 덕분에 대체자인 제이크의 판도라 여정이 시작되었듯이, 네테이얌의 죽음은 로아크를 비롯한 제이크 가족에게 각성의 계기를 마련한다. 이는 감정을 건드리되 눈물을 이끌어내지는 못하는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다. 막내인 투크티리는 아예 비중이 전무한  덤이다.



제이크 가족의 의붓아이들이자 서로에게 미묘한 호감이 감도는 키리와 스파이더는 기묘한 대칭점을 이루고 있다. 키리는 상술했듯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는 범상치 않은 출생의 비밀과 에이와 전체와의 교감이라는 잠재력으로 하여금 어린 메시아로서의 위상을 가진 캐릭터다. 그러나 다른 구성원의 행적을 비추는 사이 키리의 능력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입지는 어쩔 수 없이 들쭉날쭉하게 느껴진다.


반대로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 나비의 생태를 익힌 스파이더는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없는 동시에 나비족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쿼리치의 자식이다. 그런데 생물적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을 고수하면서도 그의 안내자로서 선선히 행동하다 막판에 아버지를 구하는 모습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그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인다. 한편 쿼리치가 키리의 어머니인 그레이스 박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임을 감안하면, 이 둘 사이에는 육체적 한계뿐 아니라 혈연상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복잡하면서 흥미진진해질 만한 캐릭터간의 구도를 단지 구성 단계에서 멈추고, 물속을 맴돌듯 체험과 납치, 구출의 과정을 반복하기만 한다. 이는 영화가 지닌 시리즈의 새로운 서막의 역할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녀들의 고민을 함께 해결해줘야 할 제이크와 네이티리 부부의 기여도가 그만큼 부족해서다.



자식들에게 비중을 몰아준 탓인지, 두 부부는 전작의 주인공이라는 위상이 무색하게 후반 전까지 이렇다 할 행동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군상극에서도 엄연히 중심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 그 역할을 맡아 슬기롭게 위기를 헤쳐나가야 할 부모들이 오히려 싸움 잘하는 전사-군인상으로 퇴보한 것이다. 전작에서 명령에 복종을 요구하는 쿼리치와 RDA에게 반항기를 드러냈던 제이크는 정작 기르는 입장이 되자 자녀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어려워함에도 일방적인 군대식 양육법을 고집한다. 역시 전작에서 에이와의 포용을 설파하던 히로인 네이티리는 맏아들을 잃고 나서야 모성애를 폭발시킨다. 그러나 그 모성애는 정을 주지 않았을지언정 자식들과 함께 키운 스파이더의 목에 칼을 들이밀 만큼, 복수라는 물불 안 가리는 폭력성으로 변질되어 있다.


이들이 후반부에 극의 중심으로 돌아와 '자녀들을 지키는 요새'로서 적들을 무찌르다 키리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은 뒤늦게 가장의 의무를 수행한 결과 가족의 가치를 되찾은 것이라  수도 있다. 그러나 해결되지 못한 군상의 드라마를 결국 미증유의 능력으로 애써 봉합하고 전작과 똑같은 구도로 극을 마무리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의적이다. 이렇게 되니 영화가 가족애라는 서사적 주제를 구성원간 결속과 제어를 유지하는 장치로만 유용하고, 나머지 플롯으로는 환경의 경이를 돋보이는 데만 치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가족이 이럴진대, 이들을 돕는 멧카이나 부족의 구심점인 토노와리와 로날 부부는 형식적인 조력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클리프 커티스와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걸출한 배우들이  정도다.


인간이라는 거악(巨惡)


여기에  하나 불만족스러운 점은 빌런의 잠재력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리콤비넌트,  재조합품이라는 설정은 잘만 풀어내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수도 있었다. <터미네이터> 악당 T-800 <심판의 >에서는 똑같은 피지컬에 수행하는 임무만 달라짐으로써  코너를 지키는 영웅으로 탈바꿈했다면,  영화에서는 군사적 목적에서 복제된 자신의 영혼이 정작 자신이 경멸하던 적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의 지휘관인 쿼리치는 나비에게 귀화한 아들 스파이더와의 적대관계까지 겹쳐  영화에서 가장 복잡한 내면서사가 진행되었어야  캐릭터였다. 초반부에 쿼리치의 시점에서 원래 쿼리치와 제이크 설리의 행적을 쫓아가는 몇몇 시퀀스는 꽤나 흥미로운 심리적 충돌이 엿보이는 지점이다.


하지만 쿼리치는 제이크에 대한 복수라는 임무 앞에서 이러한 고뇌를 내버려둔  일차원적인 아치에너미의 굴레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한다. 군데군데 정체성을 고민하는 흔적이 보여도  행로는 전작 이상으로 직선적이고도 악질적이며,  과정에서 보이는 감정이나 가치관은 전작과 하등 다를 바가 없기에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차라리 그를 2 주인공으로 삼아 인간 쪽의 속사정을 표현했더라면 이야기가 훨씬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결말부에서 갱생의 여지가 보이고, 후속작을 염두에  전개라는 점에서 그나마 비판을 덜어야 하는 것일까.


결국 쿼리치의 이야기가 온전한 완성도를 얻으려면 역시 속편을 기다려야 한다. 그 점에서 그간 카메론이 보여줬던 단일한 시네마적 구성은 실패한 것에 가깝다. 성장통을 겪는 자식들을 부모가 구출하고 그 부모를 자식들이 구출하는 이야기는 밀림에서 바다라는 배경만 바뀌어갈 뿐 지엽적인 느낌이 강하다. 결국 구조적 완성도에서는 다소 평이했더라도 기승전결과 맺음새가 뚜렷했던 전작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이 영화의 진짜 빌런은 쿼리치가 아니라 RDA를 위시한 인류 전체라는 생각이 든다. 앞서 언급한 생태주의적 가치관을 끌어온다면 인간에게는 나비의 뉴런을 통한 동식물, 나아가 모신인 에이와와의 상호교감능력이 전무하다는 생물적 한계선이 그어져 있다. 판도라라는 완성된 생태계에서 인간은 더더욱 끼어들 구석이 없는 것이다. 판도라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보면, 자원에 대한 호기심에 건드려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히고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악인들이 된 셈이다.


전작에서는 아바타 프로그램을 비롯한 연구진의 교류를 통해 이 격차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본작의 인간들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초반부터 대놓고 숲을 불태우는 패악을 저지르고, 화합을 위해 복제했던 나비족의 육체 또한 철저히 군사적 목적으로 쓰는 등, 평화적인 면모는 일찌감치 내다 버린 채 적의 입장을 고수한다. 자원채굴지로 한정하고 있던 판도라를 (그 모든 생물학적 위험 요소에도 불구하고) 침략지이자 터전으로 삼으려 한다. 전작의 패배에 대한 복수심의 발로라면 이해는 된다. 그런데 RDA는 여기서 한 술 더 떠 인류 다수의 생존문제와는 거리가 먼 포경사업을 일삼는다. 인류측의 목표 자원이 언옵타늄이라는 광물에서 암리타라는 초호화 상품으로 옮겨갔다는 것은 상당히 급진적인 변화다. 쇠락하는 인류를 위해 못할 것이 없었던 절박함이 ‘불로불사’를 향한 소수 지배층의 끝 갈 데 없는 탐욕으로 바뀌는 것이다.


하물며 이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전작의 인간 중 RDA의 행정책임자였던 파커 셀프리지는 지극히 자본주의적 인간이면서도 언옵타늄이 인류의 생존에 미치는 중요성을 설파하고 나비족을 이주시키려는 외교 노선에 부분적으로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본작에서는 성년도 되지 않은 동족인 스파이더에게 고문을 가하는 군인 장성은 물론이고, 툴쿤에게서 일말의 죄의식 없이 생명의 정수를 뽑아내어 돈 생각만 하는 포경업자, 그를 말릴 생각보다 패배주의에 젖어 술잔을 기울이는 과학자까지, 어느 한 명의 인간에게도 동정의 여지가 없다. 덕분에 관객인 인간의 입장에서는, 문명의 침략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의 선을 벗어나 인류에 대한 비난으로 오폭된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결국 야심이 문제


<타이타닉>의 개봉 전부터 기획을 시작했던 <아바타> 시리즈는 제임스 카메론이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라이프워크다. 13년의 시간을 영화 한 편의 제작뿐 아니라 이후 나올 3편의 후속작에 대한 청사진까지 기획하고 촬영하는 데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들에 쏟아부은 야심의 규모와 깊이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192분이 지나고 나면, 한 편의 영화로 그것을 모두 담아내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벅찬 과제였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는 아직 설명되지 않은 세계관만큼이나 봉합되지 않은 플롯의 상처들이 많고, 그렇기에 자연에 대한 경이를 가득 담은 영상마저 어느 순간부터는 동어반복이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속편이자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점이라는 복합적인 위치 덕에 평가가 다소 박한 감이 다. 그러나 후속작에 완성도의 몫을 떠넘기는 것은  편의 영화만으로 최상의 재미를 선사했던 카메론의 명성에는 걸맞지 않다. 아마  영화  편이 나오기까지 13년이란 시간은 너무 길었고,  사이 관객의 기대감과 만족감은 더더욱 쉽게 채워질  없게  것인지도 모른다. 별천지의 비주얼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극장 관람의 가치는 충분하지만, 제임스 카메론의 손길에서 탄생한 영화들은 언제나  이상의 감동을 선사해왔다. 기승전결이  짜인 기존 작품들에 비하면 거대한 서사의 시작부분만을 맺음하는  영화에 상대적으로 감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없다.



물론 오스카를 쓸어담으며 블록버스터의 장인이라 불리던 그가 황혼기에 들어 시네마의 의미를 잊어버렸을 리도 없다. 카메론은 과거 조지 루카스나 피터 잭슨이 그랬듯이 단순히  편의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무결한 모습으로 창조하는  공을 들이고 있는 모양새. 때문에 나중에 완성된 시리즈 전체를 조감했을 때는, 그가 기존에 만들어 왔던 영화와는 분명 다른 시선의 감상이 필요할 것도 같다.   영화  편만으로는 그의 야심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아직   없다.


미완의 스토리를 제하고 보면 <아바타: 물의 >  해의 끝을 장식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판도라의 세계관과 이를 둘러싼 갈등은 더욱 다양한 층위로 퍼질 것을 암시하고, 비주얼의 깊이감뿐 아니라 액션 장면의 연출에서도 그저 스케일을 뽐내기만을 좋아하는 상업영화들이   배워야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2 뒤에 나올 후속편에서는 끝이 없는 야심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의 오랜 팬으로서 이것이 헛된 기우일 거라고 믿는다. 제임스 카메론의 이름이 주는 기대감은, 여전히 가슴 두근거릴 만큼 건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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