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이 나의 적인 것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언젠가, 부모님이 지쳐서 우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사건이나 매체를 접한 그 순간에 감동하거나 슬퍼하며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단함을 견디는 것이 한계에 다다라 숨길 기색도 없이 우는 모습 말이다. 부모님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못 보셨을 분들도 있겠지만, 그것을 들키게 되는 순간이 분명히 있으리라 믿는다. 내 경우 어느 순간이었는지는 차마 말하기 어렵다. 다만 그 순간부터, 노동의 땀으로 눈물을 가리고 살아야 하는 부모의 삶이 두려워졌다.
에리크 그라벨 감독의 영화 <풀타임>은, 그 지친 부모의 눈물로 깊은 파문을 남기는 영화다. 이 영화엔 어떤 예측불가의 반전도 없지만 대신 관객의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지독한 하이퍼리얼리즘이 있다. 소재 측면에서 절제된 독립영화의 문법을 쓸법하지만 영화는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다. 카메라의 시선은 한시도 빠짐없이 주인공 '쥘리(로르 칼라미 扮)'의 행적에 맞춰져 있다. 첩보영화에서나 쓰일 법한 전자음악은 그녀의 출퇴근 사이의 일상에 도사리는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하지만 쥘리가 해치워야 할 것은 거창한 범죄자나 악당이 아닌 그녀의 하루하루일 뿐이다. 그것이 오히려 영화를 더욱 무시무시하게 만든다.
영화는 88분의 시간 동안 쥘리가 처한 현실을 꽉 채워 보여준다. 파업으로 막혀 버린 출근길을 뚫는 데 성공한 그녀가 도착한 일터는 아이러니하게도 쉼터의 역할을 하는 호텔.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가 하는 일은 손님의 하룻밤의 흔적을 지우는, 사실상 집안일의 연장선인 청소이다. 여기에 그녀를 둘러싼 주변인들 누구 하나 협조적이지 못하다. 말을 듣기는커녕 말썽만 부리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맡기 부담스러워하는 이웃집 할머니, 첫날부터 실수가 잦은 신참, 근태를 지적하며 보고서를 채근하는 상사, 전 직장 경력을 두고 압박하는 면접관까지. 한쪽으로는 허구한 날 걸려오는 은행의 독촉 전화를 무시하면서 한쪽으로는 도통 답신이 없는 전남편에게 모자란 양육비를 독촉해야 한다.
그 모든 난제들을 온갖 임기응변으로 돌파해 보려는 쥘리의 모습은 신파가 없는데도 눈물겹다. 시종일관 바쁘게 걷고 뛰는 뒷모습과 옆모습에서 일상에 쫓기는 다급함이 여실히 느껴진다. 아이들의 뛰어노는 모습 뒤로 파도가 덮쳐오는 꿈은, 어머니로서 계속 맞아야 하는 풍파의 시각화이자 두려움이기도 하다. 잠들 때마다 퍼지는 호흡도 너무나 짤막해서 자고 있는 사람의 숨소리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얼굴에 떠 있는 고단함을 무시하려는 듯 중간중간 미소를 띨 때마다, 오히려 그 내면은 조금씩 깎이고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이하 결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외에 아들이 팔을 다친 후 출근 준비를 하는 장면에서 이어지는 두 개의 쇼트가 특히 인상적이다. 여느 때처럼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다가 속절없이 흐르는 눈물도 애써 덮어버리려는 쥘리.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잔주름과 눈의 실핏줄은 마치 굳건한 의지의 균열 같아 보인다. 게다가 다음 쇼트에서 쥘리는 아이들의 저금통 속의 돈을 몰래 빼낸다. 이건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하지만 그녀의 숨 막히는 삶에 자신의 삶, 또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대입하며 달려온 관객은 그녀가 다다른 심리적 한계를 쉬이 비판하기 어렵다. 이 모두가 배우 로르 칼라미의 훌륭한 연기 덕분이다.
하지만 이웃 할머니의 배려가 잠시 숨통을 트이게 한 것도 잠시, 결국 파업으로 막힌 출근길이 결국 쥘리의 나머지 출근에 종지부를 찍어 버린다. 할 수 없이 그녀가 마트 일용직을 지원하기 위해 수정하는 이력서엔, 놀랍게도 경제학 석사 과정까지 수료한 과거가 보인다. 굳이 그걸 따지지 않아도 쥘리는 분명 우수한 인재다. 출퇴근만으로도 바쁜 장거리 직장 생활 속에서도 동료들보다 높은 직급을 유지하고 유통회사의 면접을 따내는 능력까지. 그런데 이런 인물이 왜 자신의 적성과는 거리가 먼 호텔 룸메이드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을까.
이력서는 쥘리의 가난이 과연 개인의 책임인지를 묻는다. 쥘리가 듣는 라디오와 TV는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파업 소식을 들려준다. 주변인들이 그녀에게 비협조적인 것 또한 그녀가 잘못을 저질렀거나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기보다 자신들 또한 각자가 처한 현실 위에서 줄타기하며 간당간당하게 하루를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이 영화에서 그나마 여유로워 보이는 것은 은퇴한 사람들이다). 능력 있는 인재가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자 노력하다 되려 가난에 몰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옳은 일일까.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 그녀의 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시스템의 무능이다. 프랑스는 옛날부터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제도로 유명한 세계 7위의 경제 대국이었고, 최근까지도 노동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풀타임> 속에서는 파업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둘째 치고 장거리 출퇴근자들의 교통 대책에 대해서도 나 몰라라 한다(프랑스의 교통 파업이야 원래 유명하긴 했다만, 출퇴근길에 민감한 한국의 직장인들에겐 그 답답함이 배가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영화는 가난한 자가 더욱 큰 가난에 빠지는, 양극화의 사각지대를 조명한다. 개혁에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정부의 모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 점에서 이 영화의 엔딩마저 온전히 행복이라 여길 수 없다. 다가오는 기차의 경적소리 앞에서 그녀가 선로로 달려들지 않을까 걱정되는 순간, 화면은 갑자기 도로를 달리는 차 안으로 전환된다. 감정이 사라진 듯한 쥘리의 옆얼굴을 그림자가 덮어버리고, 그녀의 가족은 학교가 아닌 놀이공원에 도착한다. 아이들이 놀이기구에 타는 순간 느닷없이 합격 전화가 걸려오고, 예상 못한 희소식에 기뻐하며 눈물 흘리는 쥘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그런데 쥘리가 감정을 드러낼 때 얼굴을 화면 가득 잡았던 카메라가 정작 감정이 폭발하는 이 순간에는 그녀에게서 거리를 둔다. 팔을 다친 아들의 빈 옷소매도 멀쩡한 팔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결정적으로 놀이공원을 향해 가는 차 안에서 쥘리는 조수석에 앉아 있고,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누군지 보여주지 않는다. 전남편일까? 아니면 다른 이웃일까? 이 엔딩은 마치 쥘리가 꾸는 백일몽처럼 보인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는 이상 슈퍼맘은 그저 환영일 뿐이라고 말하는 꿈.
<풀타임>은 누구나 경험했을, 그리고 경험하고 있을 일상을 한 여인의 며칠 안에 축약해 시종일관 높은 몰입도를 유지한다. 영화를 가리켜 '일상 스릴러'라 칭한 배급사 슈아픽쳐스의 카피라이트 문구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을 거 같다. 동시에 그러한 스릴의 근원을 사회의 구조적 결함으로 지칭한다는 점에서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이, 소재는 전혀 다르지만 역시 사회비판을 골조로 한 스릴러라는 점에서 라쥬 리 감독의 <레미제라블>이 떠오르기도 한다.
지옥의 출퇴근길을 비롯해 모든 일상이 간당간당한 우리의 현실도 쥘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극장을 나서는 순간 영화가 시작된다는 명언에 더없이 부합한다. 특히 맞벌이 가정이 대부분을 차지할 청년 세대에게는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과거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 것 같다. 그 어린 날의 우리들이 천진하게 놀 수 있도록, 인생이라는 파도 앞에서 자신을 치열하게 맞부딪쳐 살았을 시절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