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인터뷰
22. 03. 2024.
망원역 근처 경양식 돈가스 식당
A : 인터뷰어
B : 인터뷰이
편의상 순서대로 엮었음
- 본인의 소개부터 부탁할게요.
- 전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으로 비전을 갖고 꿈을 꾸고 있는 몽상가이기도 합니다.
- 소개부터 거창하네요. 비전을 갖고 있는데 왜 몽상가인 거죠?
- 제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알고 준비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제 삶의 탄력을 유지할 수 없어요.
저는 원래 혼자 공상하고 책을 읽는 걸 좋아해서 지금도 이상한 망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몽상가예요.
- 실례지만, 이상한 망상이라면 이를테면 어떤 건가요?
- 이를테면, 내가 싫어하는 상사가 사실은 대머리였는데 에어컨 바람에 가발에 날아가서 개쪽을 당하고 일주일 정도 병가를 내는 거죠.
- 와. 그래도 퇴사는 아니네요?
- 에이, 그 정도 가지고 퇴사는 무리죠.
- 음, 저는 그 망상에 끼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다음 질문을 해볼게요.
비서라면 사람을 대하는 업무가 많을 것 같은데, 사람의 관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 어, 훅 들어오네요. 사람의 관계란 무엇일까요?
아, 그건 꽤 시시한 일입니다.
- 시시하다? 중요하다고 못할 망정, 하찮은 건 아니지 않아요?
- 중요하죠. 중요한데 시시한 인간이 많아서 그들과 맺는 관계가 시시해져요.
- 관계는 중요한 일이지만 시시한 인간 탓에 퇴색한다는 뜻인가요?
- 네, 맞아요. 미팅 약속을 잡고 시간을 쪼개어 일정을 만들어야 하는데 내가 보좌할 임원이 시시하거나 상대방이 시시하면 나의 노력과 시간이 허무해져 버려요.
- 이건, 시시한 인간에 대한 정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 제가 생각하는 시시한 인간이란 이래요. 시간 약속을 잘 못 지키는 사람, 매우 물질적인 사람,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인간, 자신의 경험만이 최고인 사람, 무례한 인간입니다.
- 비서님의 대답에서 깊은 분노가 느껴지네요. 생각보다 그런 경우가 많나요?
- 보통, 당일의 일정 소화량은 90퍼센트 정도이고 중요한 일정만 모두 소화해요. 특히, 결재가 많거나 언론 인터뷰라도 있는 날이면 그날은 제가 죽는 날입니다. 각종 불만과 욕설이 팡팡 터지기도 하거든요.
게다가, 여자를 화분의 꽃처럼 여기는 인간을 만나기라도 하면 제 망상이 춤을 춥니다.
- 그건 칼춤이겠군요.
- 그럼요! 타란티노 감독도 울고 갈 명장면이 쏟아질 걸요?
- 그렇지만 본인의 일을 사랑하잖아요? 그렇다는 건 시시한 관계만이 아니라 좋은 관계도 많을 것 같은데요?
- 네, 그러니 세상을 견디며 살 수 있는 거잖아요. 일단, 제 눈앞에 계신 부서장님과 나의 동료들, 그리고 입사 때부터 저를 도와주고 계신 나의 사수인 부실장님까지. 회사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는 수호신들입니다.
- 수호신이라니, 영광입니다.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건 그들이 시시하지 않다는 뜻이겠네요?
- 그렇죠. 그 사람들은 교감하려고 애쓰고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해요. 업무에 있어 난관에 부닥쳤을 때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부단히 힘쓰는 게 보입니다. 무엇보다 그 사람들은 무례하지 않아서 좋아요.
- 이제, 비서님에 대해서 조금은 알 것 같군요. 그런데, 갑자기 궁금한 점이 생겼어요.
그 가방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나요? 꽤 묵직해 보이네요.
- 아, 이건 제 업무용 보따리예요. 한 번 열어보면, 이렇게, 각종 수첩들과 일정표가 있습니다.
- 와, 엄청나네요. 각 거래처 및 언론 인터뷰가 따로 정리되어 있군요?
- 그렇죠. 그리고 마무리된 것과 앞으로의 일정이 담긴 메모장, 내가 개인적으로 메모한 것들이 있습니다!
- 이거야 말로, 프로페셔널의 보고(寶庫)로군요. 이건 명함이고, 이건 뭔가요?
- 아, 일단 제 명함부터 받으시고. 흐흐흐. 이건 말이죠. 일종의 기념품 같은 거예요.
일종의 홍보물이라고 볼 수 있죠.
- 또,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비서가 들고 다녀야 할 가장 중요한 물품은 무엇인가요?
- 많은 게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건 비상시 임기응변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두통약부터 각종 밴드도 포함되고 이런 컨실러나 쓱싹 펜도 필요합니다!
- 그건 옷에 묻은 더러움을 지워주는 건가요?
- 맞아요. 잡동사니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꽤 많아요.
- 역시, 비서의 길은 멀고도 험하군요. 듣자 하니, 지독한 하드 워커라고 하던데요?
- 지독한 수준은 아닙니다만? 하하. 일단, 다들 열심히 일해서 저도 루팡 짓은 못하겠더라고요. 절대로 제가 근면성실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 하긴, 비서님이 보좌하는 분 중에 마녀라고 소문난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가요?
- 와, 곧 전사에서 알게 되겠네요? 제 느낌적인 느낌으로는 그분은 마녀가 맞습니다. 근데, 뭐랄까 츤데레의 성향이 있다고 할까요? 은근히 잘 챙겨주세요. 물론, 직책 할 땐 너무나 무섭지만...
- 전 아직 접점이 없어서 말이죠. 다행이라고 여겨야겠네요.
- 아, 이것도 전무님이 선물해 주신 거예요. 이게, 여행지에서 사 오신 소원의 돌입니다. 예쁘죠?
- 음, 묘한 색채가 있네요. 소원의 돌이라면 만지면서 소원을 비는 건가요?
- 돌하르방의 코 같은 거요? 크크 그건 아니고, 전무님의 말씀으로는 두 손으로 꼭 쥐고 소원을 빌라고 하시더라고요.
- 뭘 빌고 싶으세요?
- 일단, 임시완처럼 생긴 외모에 김우빈처럼 큰 키를 가진 남자 친구부터 빌어야겠죠?
- 이루어지면 꼭 알려주세요. 저도 그 여행지에 가봐야 하니까요.
- 그래서 아끼고 있어요. 휴가가 시작되면 빌어볼 겁니다!
예상보다 인터뷰가 길어졌으나 젊은 패기가 있어서 그런지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후배 세대가 가진 직업관이나 인간관계에 대해서 깊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수다를 떠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소원의 돌이 그녀의 바람대로 멋진 남자친구를 선물해 주길 바라며 기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