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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Apr 21. 2024

서사 없는 인간

4차 인터뷰

4월 19일 금요일

신사역 근처 카페


- 서사 없는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냐?

- 서사 없는 인간?

- 우리가 동창회를 한 날, 나는 내가 서사 없는 인간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어. 

- 그게 어떤 종류의 인간인데?

- 뭐랄까, 자신 만의 이야기가 없는 거야. 예를 들어 신화에 나오는 영웅을 봐. 

  영웅이 되어 업적을 남기기까지 고난과 역경을 뚫고 올라왔다는 고유한 이야기가 있잖아. 

  사실, 이건 일반인에게도 적용되는 거야. 우린 다들 고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거라고.

- 음. 우리 저마다 가진 고유한 이야기라.

- 제대로 된 하나의 인간이 되려면 치열한 고뇌가 필요해. 지독하게 무언가에 매달려 보기도 하고 박살 난

  꿈을 안고 펑펑 울어보기도 해야 하지.

- 그렇다는 건,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온 사람에게는 서사가 없다는 거야?

-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 서사는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으니 매력이 없잖아. 게다가 재미없는 서사를 

  가진 캐릭터는 더 별 볼 일이 없어.

- 그래도 사람은 저마다의 인생을 살잖아. 각자 고유한 서사 하나 정도는 갖고 있을 거야.

- 과연 그럴까? 무언가를 미치도록 열망하지도 해보지도 않은 인간들이 단순한 서사라도 갖고 있을까?

  그저 시간을 나열한 연대기일 뿐이겠지.

- 좋아. 그러면 왜 네가 서사 없는 인간이라는 거야? 너는 일에 미쳐도 봤고 갖가지 여행도 다녔잖아.

- 뭐랄까. 나에겐 신선한 교류가 사라졌어. 이제 나의 서사도 남들과 비교하면 매력이 없는 거야.

- 나도 나지만 넌 진짜 독특한 놈이야. 

  아, 그러고 보니까 누군가 생각난다.

- 그 양반도 서사가 없는 거 같냐?

- 독서 모임에서 만난 회원인데 언젠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하더라.

  그때, '나의 삶은 지금까지 굴곡이 없었어요'라고 말했어.

  우리 할머니가 들으셨다면 '참 복도 많지'라고 말씀하셨겠지?

- 아마도. 내 인생에 굴곡이 없었다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지?

  세상은 온통 돌부리이고 선택해야 할 길은 각자 멋들어지게 포장한 채 나를 반기는데 말이야.

  그 언제냐, 우린 공부하다 하기 싫어 운 적도 있는 거 같은데?

- 그랬지. 고시원 옥상에서 새우 과자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다가 너부터 질질 짰잖아.

- 시발, 그 담배 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정말 처절했고 지독하게 짠맛이었는데.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회원의 말을 듣고 그걸 망가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

  더 나아지겠다, 더 가치 있어지겠다, 삶이라는 언덕길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질문하는 나와 다르게 

  보였거든. 그래, 사람이 부러웠어.

-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나면서부터 이미 어느 정도 갖춰진 환경을 누릴 수 있는 사람.

  혹은, 성장하는 과정의 친구 관계에서부터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때까지 별 다른 문제가 없었던 사례.

  어느 쪽이 되었든 분명히 행운이 따랐다고 말할 수 있지.

  그리고, 우린 행운을 직접 채굴하러 다녀야 했었고 말이야.

- 너와 이야기를 다 누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나의 서사는 세상이 읽을 만한 걸까. 신은 나라는 책을 어떻게 감상하고 있을까.

- 그런 건 신이 아니라 행운이 함께한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하는 거야.

  모임의 그 회원 같은 사람 말이야.

- 나 역시 그렇게 게생각해. 그런데 영 접점이 안 생겨.

  타인에 관하여 호기심이 없는 세상이잖아. 남을 통해 보려는 건 오롯이 자신의 위치뿐이니.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 방지턱에 걸리고 있어.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싫어하진 않을까?

  이런 걱정이 먼저 드는 거야.

- 바로 그거다. 나는 우리가 타인에게 관심이 없으니 서사가 더욱 약해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꽉 찬 대사, 생각할 만한 양식, 철학적인 구조라는 건 결국 타인과의 교류에서 시작하잖아?

  혼자 백 번 말해봐야 소용없는 거고 타인이 없으면 내가 아무리 무언가를 깨달아도 쓸 데가 없는 거야.

  결국, 나 역시 서사 없는 인간이 되어 버리는 거지.

- 아. 네가 서사가 없는 인간이라고 말한 이유가 그거 때문이냐?

- 그래. 나는 어느샌가 일에 파묻혀 있을 뿐 업무를 제외한 네트워크가 한정적으로 바뀌었어.

  깨닫고 보니, 나라는 캐릭터도 매력이 없어졌고 말이야.

- 그건 나도 그래. 아무리 읽고 쓰고 그려도 이젠 한계에 부닥쳤다고 할까?

  다른 모임을 통해서 벽을 넘어서려고 하지만 아직까지 기적적인 교류는 없었어.

  이건, 내가 여전히 폐쇄적인 성향을 지닌 까닭 때문일까?

- 일단, 해결책을 네 네안에서부터 찾아보는 건 좋은 방법이다.

   그다음에 네 주변으로 확장하고 최종적으로 환경을 바꿔 봐.

   사실, 나도 그럴 생각이거든. 너 이번에 강남 사옥으로 갔잖아?

   잘됐다. 환경을 바꾸기에 좋은 조건이야.

- 그래, 이제는 정말 진지하게 삶을 고찰해야 할 때가 왔어. 그래서 네가 이런 얘기를 꺼냈나 보다.

  하루는 길고 인생은 짧다는 걸 깨달았으니 서둘러야겠어. 나의 서사를 풍부하게 만들어야지.

- 좋아. 우리 영웅이 되지 못할지언정, 서사 없는 인간은 되지 말자.

  일단, 오늘의 서사는 캐러멜 마키아또로 해야겠다.

  퇴근하고 수다를 하려니 당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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