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열보다 존중으로 맺는 관계에 대하여
"이진 씨는 친구랑은 자주 봐요?"
최근 만난 지인이 불쑥 질문했다. 음, 친구라. 할 말이 없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저는 친구가 별로 없어요." 머쓱하게 대답했다. 완곡하게 별로 없다는 표현을 덧붙였지만, 사실 내게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개념의 친구 숫자는 0에 수렴한다는 것을 순간 깨달았다.
친구라는 개념은 다른 모든 개념과 비슷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만약 '친구'가 나이가 같고, 메신저로 매일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공유하는 친밀한 관계를 뜻한다면 나는 친구가 정말 없다. 한편 책 '단단한 삶'을 쓴 작가 야스토미 아유무는 친구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친구는 인간으로서 서로 존중하는 관계의 사람을 가리킨다. 자신보다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대등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는 친구다.
- '단단한 삶', 야스토미 아유무
야스토미 아유무의 해석으로 본다면 나는 친구가 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학교를 벗어난 후 사회적으로 관계 맺는 이들은 내게 모두 친구처럼 느껴진다. 즉 그들은 모두 '인간으로서 서로 존중하는 관계'에 속한다. 그중에는 동갑도 있고, 나보다 5살 많은 사람도 있고, 10살 많은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존댓말을 쓴다.
존댓말을 쓰는데 어떻게 친구라 말할 수 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존댓말을 쓰는 건 관계의 건강함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존댓말은 서로를 존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 사람은 반말을 쓰는데 다른 사람이 존댓말을 쓴다면 이미 말이라는 소통 창구에서 불균형이 생긴다. 그 불균형에서 대등하게 관계 맺는 일은 훨씬 어렵다.
한국 사회는 특히 나이로 엄격하게 서열이 나뉘는 문화가 있다. 나이에 따라 존댓말을 써야 하는 사람과 반말을 써도 되는 사람이 나뉜다. 그것은 개인 대 개인의 협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법칙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만나자마자 이름보다 먼저 나이를 묻기도 한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관계 서열을 매기기 위함이다. 나이를 먼저 묻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나이가 많은 쪽이라는 걸 이해한다면 명백한 사실이다.
인간관계의 기반이 나이로 구성되기 시작하면 나는 벌써 하품이 쩍 벌어진다. 나이가 많다고 항상 더 존중받아 마땅한 어른인 것은 아닌데,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벼슬인 듯 행동하기 마련이다. 나의 경험으로 비춰봐도 그동안 내게 이름보다 나이를 먼저 물었던 사람들 중에서 그다지 배울 점 있는 어른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동갑인 걸 알게된 사이에도 존댓말을 쓰려 노력하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쉽게 말을 놓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나는 결코 존댓말을 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 다른 사람이 한 명이라도 관여했을 때, 다시 모든 것이 서열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서열에는 또한 언니, 누나, 형, 오빠와 같은 호칭이 엮이게 된다. 나는 그런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고, 동시에 그들을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다.
호칭에는 간편함이 있는데 그 간편함이 때로는 관계를 불쑥 침범하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간편한 호칭 사이에 존재하는 관념적인 서열 관계가 껄끄럽기도 하다. 언니니까, 누나니까, 동생이니까, 라는 말로 시작되는 표상적 어구들은 그렇다할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다. 나는 복잡하더라도 상대방 한 명 한 명을 오롯이 이해하고 소화시키며 관계 맺는 과정이 좋다.
이로써 내가 왜 친구가 별로 없는지 밝혀진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참 관계에 속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다른 이들이 쉽게 이해하고 적용할 사회적인 규칙들도 매번 비판적이고 새로운 시각을 입힌다.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피곤함을 유발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방식을 좋아한다. 삶 곳곳에 존재하는 통념을 비틀어보고 상상력을 발휘하는 건 내가 가장 재미있다고 느끼는 활동 중 하나다. 사회적 통념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다 보면 생각에 큰 활력이 생기고 지성 활동을 부지런히 하도록 돕는다.
앞으로도 나는 수많은 '친구 님'과 '친구 씨'들을 만들어 가고 싶다. 남녀노소 다양하게 맺는 관계로부터 위계 없이 서로를 충만하게 채우며 배우고 싶다. 어쩌면 나의 고집이 누군가에게는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 없이 경험한 인간관계는 그 어떤 수동적 질서로 맺은 것보다 활기 넘친다. 활력있고 생생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라는 세계를 더욱 적극적으로 탐험하고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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