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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나무 Apr 17. 2022

유년의 기억 5

-답십리에서 다시 숭인동으로-

   

답십리에서 다시 숭인동으로 이사 간 집은 ‘낙산 묘각사’라는 절 뒤에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었다.

우리 집은 2층이었는데 대문도 따로 있어서 전셋집이 아니라 독채 같은 느낌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시멘트 바닥이 가로로 길게 있고 양쪽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있었다. 신을 벗고 정면에 있는 넓은 마루로 올라서면 맞은편엔 유리창으로 된 커다란 미닫이문이 있고 대청마루 양쪽에 똑같은 크기의 방이 하나씩 있었다.     

나는 왼쪽에 있는 방에서 엄마, 아버지, 언니, 동생과 함께 잠을 잤고, 오빠와 친척 오빠들이 건너편 방을 썼다.

그 시절에도 우리 집에는 오빠 친구들과 그 친구의 동생들까지 자주 놀러 왔었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시험을 보러 오는 친척들도 많았다.     

현관문 맞은편에 있는 유리문을 열고 나가면 난간이 있는 발코니 같은 공간이 복도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끝엔 내려가는 계단이 있는데, 1층으로 내려가면 주인집이 마당이 나왔다. 1층에는 주인이 사는 안채와 단칸방 셋집이 있었다. 언덕을 이용해 지어진 집이어서 1층도 우리가 사는 2층도 길에서 곧장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던 거다.     

주인집 막내아들은 내가 전학한 학교에 다녔고 같은 학년이었다. 심술이 많은 아이란 느낌이 있는데, 어떤 심술을 부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주인집 아저씨와 아줌마는 자주 부부싸움을 했다. 억센 북한 사투리를 쓰면서 무섭게 싸웠다.

한 번은 아저씨가 아줌마 귀를 물어뜯은 적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말리러 들어가면서 벗어 놓은 신발이 어지러웠다. 내 동생이 두 팔을 뒷짐 지고 걸어가서 그 신발들을 가지런히 해놓으며 "우리 엄마, 아버지는 안 싸우는데~" 하고 중얼거리던 모습이 생각난다.     

우리 집 안방 창문을 열면 아랫동네 윗동네가 훤히 보였다.

윗동네엔 동갑내기 C가 살았다. 그 애는 우리 1층에 세를 살다가 윗동네로 이사해서 잘 알고 있었는데 창밖을 보다가 역시 창밖을 보는 그 애랑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애는 손을 흔들었다. 얼굴이 하얗고 동글납작했다. 공부도 잘했는데 한쪽 다리를 절었다. 어른들이 소아마비에 걸린 거라고 말해주었다.

눈 오는 날엔 연탄재가 깔린 길을 그 애 엄마가 C를 업고 살살 걸어 내려왔다. 어떤 아이들은 쌀부대를 타고 소리 지르며 신나게 내려가기도 했지만, 난 소심하게 조심조심 걸어 다녔다.     

가끔 안방 창문 넘어 연날리기도 하며 재미있게 보내기도 했지만 그 무렵 내겐 알 수 없는 편두통이 있었다. 어린아이가 웬 편두통이냐며 엄마가 걱정하셨다. 꽤 오랫동안 편두통을 앓았고 비쩍 마른 체형에 따뜻한 햇볕이 있는 곳에 쪼그려 앉기를 반복하는 아이였다. 다행히 언제부턴가 차츰 건강한 아이가 됐고, 지금도 잔병 없이 건강한 편이다.      

전학 서류가 금방 해결이 안 됐는지 한 달 정도 쉬다가 전학한 학교는 동묘 앞에 있는 숭신 국민학교였다. 몇 년 전까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종로 산업정보학교로 바뀌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청계천 건너로 이사한 걸로 나온다.     

몇 년 전에 딸과 벼룩시장에 갔다가 들려본 적 있다. 처음 입학했던 전농 국민학교나 이웃에 있던 창신 국민학교에 비하면 아주 작은 학교였다. 나는 1학년 4반이 되었다. 1학년은 6반까지 밖에 없었는데, 1학년 4반, 5반, 6반 교실만 단층인 별도의 건물에 따로 있었다. 복도도 없이 운동장에서 곧장 들어갈 수 있었고 교실밖엔 신발장과 나무로 된 발판이 있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날씬하고 키가 컸다. 선생님은 나를 아주 예뻐해 주셨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교실에 남게 해서 이런저런 심부름도 시키고 가끔 학교 앞에 있는 대중목욕탕에도 데려가셨다. 그런 날엔 집에 가서 엄마에게 얘기하고 오라고 했다. 나는 숨이 턱에 닿게 달려가서 엄마에게 얘기하고 다시 선생님에게 달려갔다. 선생님은 허약하셨는지 늘 떼미는 아줌마에게 선생님과 나를 맡기셨다.

선생님 성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유현상. 이름은 남자 같지만, 아줌마 선생님이었다. 결혼은 했던 거 같은데 아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도 호리호리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를 듯하다. 선생님은 살아 계실까?


     

-숭신 국민학교에 전학 갔을 때 선생님이 엄마에게 학교 교복이 있다고 얘기하셨나 보다. 엄마가 큰맘 먹고 해준 교복을 입고 창경원(창경궁)에 놀러 가서 찍은 사진. 짧은 원피스를 입고 저렇게 앉다니.., 쯧쯧 ㅎ-


신기하게도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 이름들이 다 떠오른다.

2학년 때, 최금자. 3학년 땐 배정숙. 4학년 땐 안태규, 5학년 땐 김선종. 6학년 땐 김학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배정숙 선생님을 고2 때 광화문 덕수제과 앞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나누었고, 4학년 때 선생님은 대학 2학년 때 방배동 언니네 집 앞 골목에서 우연히 만났었다. 5학년 때 선생님도 대학시절 화양리에서 봤는데 나는 인사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다음 기회에 다시 써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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