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아무튼 기획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합니다.
아무튼 시리즈는 누군가를 만든, 그리고 누군가가 만든 세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좀 더 풀어 말하자면, 그 누군가가 좋아하는 것을 만끽하는 과정에서 한 겹 한 겹 쌓여 풍성해진 삶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그 책의 서문에 공통적으로 적힌 질문을 볼 때마다 저는 마음속으로 크게 "네!"라고 소리쳤습니다.
"당신에게는 생각만 해도 좋은, 설레는, 피난처가 되는 그런 한 가지가 있나요?'"라는 문장이었습니다.
제가 자랑하고 싶은 저의 '아무튼'은 '기획'입니다.
전공이나 백그라운드 같은 멋들어진 건 없습니다.
어쩌다 보니 일하는 곳마다 '기획자'라고 불렸고, 불러주니 그런가 보다 하며 살게 됐습니다.
별다른 재주도 없었습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어찌어찌 현실로 만들어 냈을 뿐입니다.
어딘가에서 들은 표현을 빌자면, 머리채와 엉덩이 사이를 오가며 얼렁뚱땅 만들냈다고나 할까요.
어린 시절, 저는 기획과 저를 매칭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건 뭔가 어마어마하게 어마어마한 분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제 커리어는 중구난방이었습니다.
저는 환경공학과를 전공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MBC 아카데미에서 영화 연출과 컴퓨터 그래픽스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곤 뜬금없이 과학교재를 개발하는 곳에 들어갔고, 우연한 기회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국제로봇경연대회 프로젝트 매니저를 하기도 했습니다.
사이사이 월간지 기자, 화장품 스타트업 마케터를 업으로 하기도 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어느새 저는 일에서나 일상에서나 주변 사람들에게 '기획자'로 불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체성을 그렇게 인식하는 순간, 사실은 한 우물을 파왔다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취미조차도 기획이었습니다. 시간만 나면 자작 보드게임 만들기, 시퀀스 포토 촬영 같은 것들을 즐겼으니까요.
참고로 특기는 들이 파기, 어지르기, 판키우기입니다.
그야말로 삶이 기획으로 점철된 기획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저는 MBTI 유형 중에서 대문자 P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묘사하는 P유형은 이렇습니다.
즉흥적이고 자유롭다.
호기심이 많아 일을 많이 벌린다.
지구력이 떨어진다.
관심사가 넓고 얕다.
계획적이지 못하다.
네,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물론 가끔은 사람들에게 "되게 계획적이네요, J에요?"라는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만,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획자로 살아온 삶이 큰 지분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죠. P형과 기획자라니요.
그래서 씁니다.
저의 '아무튼 기획'!
일명 "피의 기획"입니다.
지금쯤이면 눈치채셨겠지만 어그로입니다. 'Blood' 아니고 MBTI 유형 'P'입니다.
개인적 경험에 기반한 본격 '저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야기 묶음집이랄까요?
매우 사적인 이야기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매우 주관적이고요.
부제는 '본투 P 기획자의 피 철철 나는 생존기' 쯤 될 것 같습니다.
P형이 기획하며 살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앞으로 제 글을 읽으며 제 머릿속에 들어와 제 눈으로 세상을 같이 바라봐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생각에 동의해 주시고, 제 마음처럼 느껴주신다면? 하고 몰려오는 졸음 속에서 셀프 도파민 뿜뿜 해봅니다.
자, 그럼 이제 유리병에 편지 한 장 말아 넣고 강물에 내려보내는 심정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