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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Mar 02. 2024

개화

와인바의 문을 닫고 카페만 운영하게 되면서 저녁에 시간이 생겼다. 대체로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고 아이와 놀아주다 아이를 재우면서 나도 한두 시간 잠을 자고 일어나 아내와 야식을 먹으며 영화를 보거나 아내도 잠이 들면 작업실로 올라와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이렇게 오랜 시간 앉아 독서를 하는 일이 무척이나 오랜만이라 책을 읽으면서도 '이 시간에 돈을 벌어야 할 텐데'라는 걱정을 떨치느라 애쓰는 중이다. 장사꾼 기질이 부족한 인간이 매장을 두 개나 운영하면서 어지간히 불안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비어있는 시간이 아직 어색하지만 '진정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데 쓰려고 노력 중이다. 


'진정 하고 싶은 일'이래 봤자 책을 읽거나 연기 연습을 하는 일이다. 사실은 반평생을 계속해왔던 일이 경제적인 사정으로 잠시 중지된 것인데 (여전히 경제적인 사정은 유효하다만) 경제적 여유에 대한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니 원래 꿈꾸었던 것들이 먼저 손에 들어왔다고 말해야겠다. 


이어서 하려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시 여담을 하자면 요즘 누굴 만나는 자리마다 "대문자 T네요", "파워 E네요"라는 소리를 듣는데, "저의 성격을 고작 16가지의 유형으로 나눠서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제 너무 많은 질문에 지쳐 "네. 그렇습니다" 하고 말게 되었다. 간단하게 E는 외향적인 성격, T는 이성적인 성격을 뜻한다는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외향적인 성향이 도드라지고 혼자 있거나 집에 있을 땐 지극히 내향적이고 차분한 성격이 된다. T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딱히 반박할 수는 없지만 글을 쓰거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는 꽤나 F의 성향이 나타나기도 한다. 


MBTI 분석에 지쳐 잠시 쓸데없는 길로 빠졌지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혼자 있는 시간을 꽤나 즐기는, 남들에게 하지 못할 이야기를 홀로 적어내며 웃고 우는 시간으로 발전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종종 말실수를 하곤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마음속으로 한 번 생각해 보고 내뱉는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과정을 말하자면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작업실로 올라와 복기해 보고 그중 인상 깊거나 되짚어봐야 할 부분을 글로 쓰거나 관련된 책을 읽고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그때 생각한, 보다 현명한 방식으로 대처하면서 성장하려고 하는 방식이랄까. 


이런 과정을 통해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깊게 사유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관조하고, 나이는 들었지만 성장하지 못한 부분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상처를 치유해 주는 시간을 갖는다. 성장은 가만히 방치해도 자라나는 부분이 있는 반면 손봐주지 않으면 더 이상 자라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한다.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일어나 버린 일들'로 생긴 감정과 그로 형성된 성격이나 반응들이 보통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데 이런 일은 힘들더라도 다시 한번 나에게 일어나 주거나 '그때 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에 대한 깊은 고민과 유추가 필요하다.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해소되지 않는 감정에 대한 풀이의 기본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하기에 답답하더라도 자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편이다. 


최근에는 '나는 진정으로 연기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빠져 있다. 나보다 훨씬 오랜 기간 연기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도 나름 반평생을 연기에 몸 바쳐 살아왔는데 그만큼의 애정이나 실력, 깊이나 경력을 갖추고 있느냐에 따른 자기반성적이면서도 사랑하는 직업에 관한 애증 같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면 좋아하는 취미와 비교를 해보곤 하는데, 주짓수는 근 3년 간 가장 재밌게 즐긴 운동이고 누가 시키거나 돈을 주지 않아도 달려가게 되는 취미생활이었다. 하지만 최근 이사로 인해 체육관에 나가기가 어려워 운동을 멈추고 나니 매일매일 몸이 근질거려 미치겠다는 생각뿐이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도복이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뒹굴다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다. 


문제는 연기를 안 하고 있어도 몸이 근질거리지 않는 현재의 상태를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인데, 이미 여러 곡절을 거쳐온 탓에 내성이 생긴 것인지, 이왕 평생 직업으로 삼은 거 조급해지지 말자는 마인드 컨트롤이 제대로 적용된 것인지 헷갈리게 되었다. 어쩌면 돈이나 커리어가 되지 않으면 함부로 하지 말자는 상업적인 마인드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일상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게 되는 독백이나, '또' 주인공이 되어 버린 지인을 바라보면서 약간의 질투가 생긴다는 점이 여전히 배우로서 욕심을 갖고 있다는 안심으로 자리 잡는다. 무엇보다 지금도 언젠가 반드시 배우로서 꽃을 피우는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이 마음 한편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안심이 된다. 


겸손의 미덕을 배운 탓인지, 수많은 실패를 겪은 패기로 인한 자존감의 축소인지, 혹은 둘 다 인지 모르겠으나 벚꽃은 한 시절 피우지만 벚꽃이 졌다고 벚나무를 자르지 않듯 누군가는 또 벚꽃이 만개하는 날을 기다리는 법이니 내내 푸르른 소나무는 못 되더라도 이따금씩 찾아오는 벚꽃동산이라도 되어보자고 또 부푼 꿈 한 번 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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