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라는 직업이 상상 속의 동물처럼 환상적으로 보이던 시절이 지나고 그 직업이 가진 애환과 고충이 내 삶에도 자리 잡았다. 성공한 배우들에게도 깜깜한 과거가 있었고 미래가 창창한 배우지망생들에게도 막막한 희망이 있다. 나는 그 언저리에서 오래된 신인 배우라는 별명을 달고 비상할 듯 날아가지 못하고 추락할 듯 떨어지지 못하며 위태로운 경계에서 자꾸만 머뭇거린다.
어떤 상황이든 긍정적으로 풀어내다 보면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생기듯, 나는 내 삶이 실패라는 이름표로 점철되지 않게 하기 위해 부지런히 다른 구멍을 팠다. 물이라도 차오르면 금세 허물어질 얕은 구멍을 아슬아슬하게 뚫어가며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지만, 오래전 깊게 파놓은 연기라는 구멍이 허물어지진 않았는지 먼발치에서 경비만 섰는지도 모르겠다.
장사 하나를 접으며 배우로 '복귀'한다는 마음으로 재정비를 해봤다. 처음 배우가 되고자 했을 때 매일 빠지지 않고 했던 훈련들과 연습량을 떠올려보고, 무대에 서거나 촬영장에 가는 것만이 배우의 일이 아니라 꾸준히 학습을 해야 한다며 평소엔 쓰임새가 없는 이론을 노트에 적어가던 시절을 상기했다.
해야 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연기가 알고 싶어서 그토록 많은 작품을 감상하려고 졸린 눈을 털어내며 밤새 영화를 보던 날, 그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내가 싫어 인터넷을 뒤져가며 숨은 의미를 파헤치던 그날들이 생각났다. 그런 날이면 다음 날 억지로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그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혼자 떠들어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꼴사납지만 아는 체가 무척이나 하고 싶었다. 내가 연기에 대해 진심이라고,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그걸 알아달라고 하고 싶었으리라.
어느덧 훈련과 학습보다 촬영장에 가는 빈도수가 늘거나 작품을 만나 유명해지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는 게으른 배우가 되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만 자신만만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새로운 고수들은 날마다 태어나고 있는데 말이다.
존경하는 배우들의 작품은 놓치지 않고 챙겨 보면서, 그 배우들이 하는 노력은 모방이라도 하고 있는가 냉정하게 스스로를 평가해 본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지만 영웅지망생도 시대를 만들 수 있다는 패기를 부리던 지난날의 큰 목소리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현실에 부딪혔다는 핑계를 너무 오래 해왔다. 작품이 꾸준하지 않다면 누구나 겪을 생계 문제를 떠들어봤자 나아질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결계를 열심히도 쳤다. 견고하게 다져진 결계 덕에 나는 다행히 산소를 호흡하지만 결계 밖에서 느껴지는 생명력을 바라보며 손을 뻗는다.
나는 무엇이 되려고 했나. 흔들리는 파도가 되는 것이 두려워 침식하는 돌덩이가 되진 않았나. 이렇다 할 계획 하나 없지만 용기를 내 결계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