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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재 Jun 12. 2023

8일간의 무지출 타지생활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0

연락을 받고 도착한 곳은 대합실 유리창에 덧대어진 철창으로 나를 겁주던 브루트키(Vrútky)역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건장한 사내 둘의 투박한 오프로드에 올랐다. 가로등 하나 없는 산골을 지나 도착한 곳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부서진 성을 다시 짓기 위해 마련된 여관이 있었다.



성의 입구와 여관. 경치와 분위기 하나는 끝내주었다.



다른 워크어웨이어Workawayer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먼저 도착해 있던 한 커플이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리옹Lyon에서 수의과를 졸업한 3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캠퍼스 커플에서 인생의 동반자로 관계가 발전한 케이스였다. 결혼 후 저렴한 캠핑용 밴을 구해 유럽 전역을 누비는 중이라고 한다.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다 안정적인 여정을 위해서는 한정된 자금 안에서 물과 식량의 양을 조절해야 할 것이다. 보일러나 화장실, 수도 같은 배수와 관련된 장치에서부터 자동차 정비 시 다루어야 하는 도구까지 수많은 기계를 다룰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방대한 공학적 지식이 없이는 감히 도전하기 어려워 보였다.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그들에게 전해 듣고 싶었다. 식사 자리에서, 휴식 시간에 잠시, 잠에 들기 전 잠깐, 우리는 8일 동안 소소하지만 다양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호스트가 요구하는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염소젖 짜기, 헛간 청소하기, 잔디 깎기, 몰탈 섞기, 자재 옮기기 등이었다.



염소젖 짜기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헛간에 싸질러진 질펀한 염소똥 위에서 쪼그려 앉아 15마리 정도 되는 암컷 염소의 젖을 온 힘을 다해 짠다. 그제야 내 악력과 지구력이 상상 이상으로 나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헛간 청소는 오전 염소젖 짜기가 끝나면 시작된다. 헛간에는 염소똥을 치우기 위한 도구들(삽, 넉가래, 갈퀴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뻘에서 꼬막을 찾듯 열심히 염소똥을 모은 다음 손수레에 담아 이른바 똥산에 붓는다.



염소똥 앞에서 긍정의 엄지 척. 이제 손수레에 담아 똥산까지 옮겨야 한다...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도, 손에 묻는 더러운 똥도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아파오는 고관절과 허리 그리고 전완근이었다. 작업이 그만큼 힘든 것이기도 했겠지만, 내 체력이 저질인 것도 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식사는 자유였다. 호스트가 표방하는 여관의 모토는 스페인 속담 ‘내 집이 네 집이다(Mi casa es tu casa).’였다. 덕분에 낯선 곳이 주는 부담을 덜 수 있었다.



햇살 좋은 날 야외에서 다 같이 차려먹은 한 끼. 진수성찬이었다.



헛간을 치우고 몰탈을 섞은 뒤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여유롭게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할 시간이 주어졌다. 약간은 고된 오전 일과를 끝내고 오후에는 잔디를 깎아야 했다. 한국에서는 아버지 사무실에서나 볼 수 있던 잔디깎이 기계를 직접 사용하게 되었다.



성 전체에 무성하게 자란 풀은 과장 조금 보태어 50cm까지 자라있었다. 성이 넓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했건만, 그마저도 혼자서 깔끔하게 다 깎기란 여간 시간을 오래 들여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 사흘을 넘어 도합 나흘에 걸쳐 잔디를 모두 깎아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귀는 일찍이 먹먹해져 있었다.



잔디 좀 깎고 몰탈 좀 섞었을 뿐인데... 장갑이라도 꼈어야 했나 보다.  



어느덧 우리의 호스트 야로(Jaro)와 친해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들어보니 주말마다 성수기 때는 하루에 약 150명, 비수기 때는 70명 정도의 방문객이 부서진 성을 보러 찾아온다고 한다.



실제로 상당한 수의 방문객이 관람을 위해 성을 찾은 어느 주말이었다. 남녀 한 쌍의 청년들이 스클라비나 성을 둘러보고 있었다. 잔디 깎기 기계에 기름을 보충한 뒤 돌아가고 있던 중에 그들을 마주쳤다. 관람을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는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서툰 슬로바키아어로 내가 물었다.



Hovoríš po anglicky? 영어 해요?



다행히도 두 청년은 영어에 울렁증이 없어 보였다.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내가 아무래도 신기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여기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둘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그 자리에 잠시 머문 채 약간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교환하며 다시 만날 날을 약속했다. (우리는 실제로 머지않아 다시 만난다. 이 이야기를 다루게 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컴퓨터그래픽으로 탄생하는
빼어난 경치는 인간의 상상 속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어릴 적 경탄을 금치 못하며 바라보던 스크린 속 경치는 현실을 오마주한 아류작에 불가한 것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었다. CG도 결국엔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에 영감의 원천이 필요했을 것이다. 바로 그 원천이 당장 내 눈앞에 놓여있었다.



성에서 바라본 여관.



아이의 예술 감각 발달을 위해 미술관을 데리고 가는 부모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젊은 이들에게 여행을 다녀 많은 것을 보고 느끼라고 조언하는 어른들의 마음도 알 것만 같았다. 여행이 자녀교육에서 불변의 모토로 자리매김하는 이유를 여실히 설명해주고 있었다. 스크린 너머로 보고 듣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것의 간극에는 메꿀 수 없는 공간이 존재했다.  



8일간의 무지출 타지생활도 어느덧 절반이 넘게 지났다. 이미 많이도 감사한 인연을 마주친 것 같은데, 새로운 인연은 역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자원봉사를 위해 스클라비나 성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어느 천재적인 17살 소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0 - 마침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가명이며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Creative Commons, CC)에 따른 본문의 인용을 허락합니다.

원저작물의 저작권은 브런치스토리 작가 권민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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