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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재 Jun 30. 2023

6년 늦게, 부다페스트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2

잠시 지난날의 여행 이야기를 해야겠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거쳐오며 만난 인연들의 이야기이다.






체코에서 만난 두 소녀가 떠오른다. 자기네 담배 피우고 올 동안 자리 좀 맡아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온, 동양인의 얼굴을 한 그들.



우리는 서로의 다음 목적지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덴하그를 곧장 둘러볼 계획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음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았던 나는, 그저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되고 싶었다.



어디가 좋으냐고 물으니, 입을 모아 부다페스트를 추천했다. 진짜 진짜 멋있다고, 유럽에 왔으면 꼭 들러야 한다고... 본인들도 꼭 가보고 싶은데 일정 상 어쩔 수 없이 못가 아쉽다는 말을 남겼다.



'얼마나 인상적이길래?
시간도 많겠다, 근처에 가게 되면 꼭 들러야겠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슬로바키아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어느 날, 유라이Jurai를 만난 것이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브라티슬라바 대학교에 다니는 그는 유럽 일주를 하고, 여름이면 캠핑 도구를 챙겨 친구들과 멋들어진 경치에서 야영하고, 폐광 탐사나 암벽등반도 하고... 참으로 모험심 넘치는 그가 나에게 한 말이 있었다.



"부다페스트? (사진을 보여주며) 이것 봐, 진짜 예뻐. 하지만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이만한 풍경은 다른 동유럽 국가에도 얼마든지 있거든.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빈Wien이라든가...
다음 목적지를 고민하고 있다고? 그러면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가! 빈에서 베네치아까지 한 번에 가는 기차가 있어. 7시간밖에 안 걸려.
아 맞아, 베네치아는 연인이랑 가야 해. 가족, 친구랑은 가지 마. 거긴 지나치게 로맨틱하거든."



그가 이렇게 말했음에도, 그의 사진첩에 있던 사진 한 장은 나를 부다페스트로 이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결국 빈과 베네치아를 뒤로한 채 곧장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그의 눈에 보기에도 나는 굉장히 모험심 넘치는 소년이었겠지. 저 먼 동양,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물 건너 자기네 땅까지 닿았으니, 그것도 혼자, 두 달 동안 말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재밌는 녀석을 만났다, 하고 말이다.



여행 테마가 바뀌었다.
무지출이 아니라, 적은 지출로
최상의 경험을 하고자 했다.



이왕 유럽배낭여행을 시작했으니, 명소란 명소는 다 돌아보고자 했다. 그러기위해서 먼저 부다페스트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부다페스트를 품은 헝가리는 과거 왕국 시절 주변국과 교류가 잦았다. 유럽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특성 덕분에 서유럽과 동유럽의 두 가지 모습을 모두 엿볼 수 있었다.



도나우 강을 따라 조성된, 이미 거대한 도시로 변모한 부다페스트를 느끼고자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적당한 호스텔을 골랐다.



부다페스트는 지하철조차도 느낌 있다.

 


짐을 풀고 난 뒤 가장 먼저 하는 루틴이 있다. 리셉셔니스트Receptionist에게 현지어를 배우는 것. 일례로 체코에 가서는 체코어를, 폴란드에 가서는 폴란드어를 미리 공부하고 나서 데스크 직원에게 배운 걸 써먹곤 했다. 동양인 얼굴의 배낭여행자인 내가 그 나라 언어를 하니 신기하게 보였을 것이다. 내가 몇 마디 내뱉으면 그들은 웃으며 화답해 주었다. 심지어는 스클로비나 성의 호스트 야로Jaro는 내게 언어천재라고 극찬을 했으니, 그 나라 언어를 배우는 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헝가리어 할 줄 알아요?”



나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Yes"를 기대했다. 기본적인 헝가리어를 배우고 리셉셔니스트와 친해고, 일석이조인 이 방법을 이번에도 써먹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케이스는 "No." 브리티쉬 억양이 강한 그녀는 여행길에 오른 도중 얼마 간의 정착과 여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단순 직원인 것 같았다. 영어만 할 줄 알면 나머지는 배우면 되니 이 같은 꿀알바가 또 없어 보였다. 다음 배낭여행 때는 도전해 봐야겠다. 버킷리스트 추가!



호스텔 벽면에 붙은 모집공고를 보니 단순히 호스텔 리셉셔니스트만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호스텔의 바로 아래층에는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한 무료 숙박 시설이 조성되어 있었다.



난민 숙소를 보니 지금껏 인류가 경험해 온 많은 가짓수의 갈등이 가진 이면이 떠오른다. 뉴욕의 이미지는 이민자들이 만든 도시이자 아메리카 드림이다. 서로 다른 인종, 문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성장해 온 도시인 것이다.



어쩌면 한국의 서울도 뉴욕과 비슷한 정서를 가진 도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전국 팔도에서 서울로 거처를 옮긴 피난민들이 으쌰으쌰 하면서 만들어낸 도시가 오늘날의 서울이다. 각 지역의 개성이 뚜렷한 것은 물론이오, 엄청난 밀도의 인구가 살다 보니 거의 모든 방향으로 산업이며 문화가 변모해 온 것이다. (참고: 유튜브 채널; 조승연의 탐구생활. 링크)



한국의 정서와 서울의 정서는 다를 수밖에 없다. 전주 한옥 마을, 경주 황리단길, 한국민속촌처럼 우리 민족의 옛 생활습관과 정서를 엿볼 수 있도록 마련된 문화시설은 한국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의 정서는 다르다. 혼란했던 전후 시절을 극복하고 세계 흐름의 거대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날의 서울은 뚜렷한 개성과 소란스러운 조화의 도시인 것이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가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기까지 겪은 수많은 전쟁은 그 당시 국민들의 생활의 일분일초를 혼란 속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무질서함 속에서 점점 단단해져 왔을 그들의 정체성은 결국 오늘날의 아름다운 부다페스트를 만들었다.



그들의 역사와 서울의 역사를 알고 동시에 비교해 보니 서울에 조성된 빌딩 숲 사이 수많은 판자촌이 다르게 비쳤다. 우리는 도시와 문화를 확립해 나가는 길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서울이 어떤 도시로 자리매김할지, 또 내게 어떤 도시로서 비칠지 기대된다.






명성이 자자한 도나우 강의 경치를 볼 기대 하나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낭만의 끝을 보고자 맥주와 클로바사*를 가지고 언덕으로 향했다.


*클로바사Klobasa: 헝가리-슬로바키아식 소시지. 그냥 먹기엔 너무 짜... 빵이랑 먹든가 해야 했다.



10월 비수기 시즌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개중에도 연인과 함께, 배낭과 함께, 카메라와 함께 언덕을 찾은 사람들이 있었다. 동향으로 보이는 사람도 경치를 한창 즐기고 있었다. 말을 한 번 걸어볼까, 고민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사람으로부터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까 궁금했지만, 그저 스치듯 지나가더라도 때로는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는 사실은 선선히 부는 바람과 함께 풍미 좋은 안주가 되어주었다.  



모험심 넘치는 소년 유라이의 추천으로 찾은 언덕은 부다페스트의 그 유명한 경치를 담기에 아주 적절한 공간이었다. 언젠간 저 유람선도 타봐야지, 그땐 혼자가 아니기를, 생각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내 절친한 친구보다 6년 늦은 나의 버킷리스트였다. 관광을 마치고 그 친구와 소소하게 소감을 나누던 중 모험심 넘치는 소년 유라이와 연락이 다시 한번 닿았다. 자기네 동네로 오면 탑 로프 클라이밍*을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두 번 다신 없을 기회였기에 서둘러 그가 사는 동네, 질리나Žilina로 향할 준비를 했다.


*탑 로프 클라이밍: 로프를 안전장치 삼아 아파트 3층 높이의 인공암벽장을 오르는 스포츠 클라이밍의 일종.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2 - 마침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가명이며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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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저작물의 저작권은 브런치스토리 작가 권민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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