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3
부다페스트에서 기차를 타고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를 지나 유라이가 머무는 질리나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의 일이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모를 핑크색, 투명색 병을 들이키며 비스킷을 안주 삼아 먹는 세 명의 사내가 있었다. 덩치 좋고 건장한 남자들에게 먼저 말을 걸기란, 같은 수컷으로서 때로는 어지간히 긴장이 되는 일이다. 하지만 핑크색 병 한 번, 투명색 병 한 번을 번갈아 들이키며 짓는 그들의 기분 좋은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지금 마시는 게 뭐죠?"
"진 토닉이요. 몰라요?"
진 토닉을 말로만 들었지, 시도해 본 적은 없었기에 어떤 맛이냐고 물었다. "핑크색은 딸기맛 진이고, 투명색은 토닉 워터"라고 설명하는 그들은 내게 진 토닉을 마셔볼 것을 권유했다.
"진 한 모금, 토닉 워터 한 모금씩 마셔요. 그게 다예요."
마셔보니, 생각보다 맛이 너무 좋아서 놀랐다. 이런 술이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차 안에서까지 마시기 위해 챙겨 오는 술을 향한 애정이란... 슬로바키아 음식이 대부분 기름져 슬로바키아 사람 중에는 헤비 드링커가 많다더니, 슬로바키아인에 대한 인상이 이렇게 하나씩 쌓여가는 듯싶었다.
진 토닉을 계기로 그들과 이야기를 텄다. 주로 사소하고도 전형적인 질문들이 오갔다. 어디서 왔느냐, 여행은 왜 떠났냐, 무얼 공부하느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지만, 기억 속에 너무나도 좋게 자리 잡았다. 내가 이방인이라서였을까, 아니면 그들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을까, 그들의 친절은 슬로바키아란 나라와 깊은 사랑에 빠지게 하는 단초가 되어주었다.
유쾌하고 철없는 세 명의 사내와 가벼운 수다를 한 시간 정도 이어가던 때였다. 어느덧 기차는 목적지인 질리나에 도착해 있었다. 동유럽 초겨울의 초저녁은 도시 전체를 음산한 분위기로 바꾸어놓았다.
질리나의 중심지에 위치한 한 호텔에서 투숙할 계획이었다. 호텔 로비에 커다랗게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중년의 남성은 영어로 대화하는 것에 익숙지 않아 보였다. 다행히도 손짓 몸짓 섞어가며 대화를 한 덕에 제값 주고 호텔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루종일 기차에 앉아있는 것도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얼른 짐을 풀고 따뜻한 물에 몸을 녹였다.
슬로바키아 근교 작은 도시의 풍경은 나의 고향을 되새기게끔 했다. 인구수 4만 정도의 전혀 크지 않은, 도시라는 이름보다는 어쩌면 마을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나의 고향. 먹고 자는 데는 문제없었지만, 열정으로 들끓는 젊은 피가 꿈만 꾸며 살기에는 너무도 황량했다.
이곳 질리나에 사는 젊은 피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20대로서 해야 하는 것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행복을 좇고 있는지, 꿈을 아직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진 않은지... 고민을 나눌 슬로바키아 친구를 찾고 싶었다. 염원이 이루어진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케잌 만드는 모습이 정말 멋진 친구, 쟝카를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쟝카에 대해서는 후에 다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모험심 강한 소년, 유라이를 만날 약속의 날이었다. 심심할 때 폐광 탐사도 하고, 날씨 좋은 여름날 친구들과 캠핑도구 챙겨 배낭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낭만적인 소년. 바로 그 소년이 내게 탑 로프 클라이밍을 가르쳐준다니, 정말이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유라이가 언어에 특출 난 재능을 보이는 데에는 그의 유년기 배경이 한몫을 한 듯했다. 슬라브족 언어권* 사람들은 서로의 언어를 절반 가량 이상 이해할 수 있다. 어렸을 적 영국에 살았던 것을 시작으로 영어와 슬로바키아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며, 슬라브족 언어권의 이점을 살려 폴란드어와 체코어를 이해할 수 있고, 최근에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로 뻗어나갈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그의 배경이 부러움을 사는 동시에 동기부여가 되어주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인인 나는 돌궐족 언어권**의 언어를 빨리 배울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슬라브족 언어권: 슬라브족(Slavic) 사람들이 쓰던 언어에 뿌리를 두는 언어권. 폴란드어, 체코어, 슬로바키아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돌궐족 언어권: 투르크족이라고도 하며, 오늘날의 몽골, 터키, 일본, 한국이 이에 해당한다. 어순이 다른 언어와는 크게 다른 것이 특징이다.
질리나 근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클라이밍장을 자랑하는 클라이밍 센터, 라스칼라LA SKALA에 도착해 내부를 클라이밍장을 둘러보았다. 규모에 압도되는 인공암벽장의 크기는 사진으로 실감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했다.
안전용 밧줄 묶는 법도 배우고, 빌레잉Belaying하는 법, 빌레이어Belayer와 클라이머Climber 사이의 수신호까지 완벽하게 숙지했다. 이제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벽을 오르는 것!
끝나고 숲에서 쉬고 있는데, 동양인 부부로 보이는 한 커플이 그들의 자녀로 보이는 아이와 함께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그들은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사진 찍는 것은 그저 말을 걸기 위한 명분이었음을 그들도 알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계기로 대화를 텄다. 타지에서 동향 사람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사진으로 남김과 동시에 어떤 이유로 여기에 오게 됐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기아KIA 협력 업체에서 종사하고 있는 남편의 출장을 가족 단위로 떠난 것. 아내는 중국인이었다. 한국말을 너무 잘해서 당연히 한국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솔직히 너무 깜짝 놀랐다. 한국인에게 중국어를, 중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엄청난 재능이었다.
부산 소재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교환학생 수학이 끝난 뒤에도 다시 한국에 찾아와 결혼을 했다고. 정말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언젠가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고전적이지만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감상하고 있던 것도 어느덧 한 시간이 넘어갈 즈음이었다. 그들의 베이비시터가 곧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양 문화에 관심이 있는, 나와 또래인 슬로바키아 소녀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었기에 그녀와 연락처를 교환하고자 했다. 쟝카와의 인연은 이런 우연한 과정으로 시작되었다.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3 - 마침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가명이며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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