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GPT에 '살림'이 뭐냐 물었다.

어서 와 살림은 처음이지?

by 김이서

어서 와, 살림은 처음이지?

작년 9월, 6개월 남은 육아휴직을 쓰고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린이집 째고 둘이서 당일치기로 바다도 보고, 전시회랑 체험도 가고, 산책도 다녔다. 안전한 식재료를 골라 손수 밥과 반찬을 해주고, 온 가족이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늘 8시 즈음 집에 도착해 30분 남짓 아이 얼굴을 보던 평일을 보내다가 더없이 행복한 하루하루를 살았다.


물론 몸은 고됐다. 어느 날은 아이를 안아 올리려다 갑자기 허리에서 날카로운 고통이 밀려왔고,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두 달간 치료를 받는 동안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집안일이 손가락을 굽힌 채 힘을 주는 동작들이 많은 탓에 손가락 관절이 부어오르고 통증이 생겼다. 몸이 아프니 집안일이 점점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가계부도 미루다 월말에 몰아 쓰게 되었다. 아이를 안아 올릴 힘도, 퇴근 한 남편을 반겨줄 힘도 점점 쪼그라들어 갔다.


솔직히 집안일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종일 회사에 있고 집에서는 씻고 자는 것만 했었다. 그러니까, 난 집안일을 주말에만 잠깐 했었다. 아이를 돌봐주던 엄마와 청소 매니저님이 다 했었다. 일을 그만 두면 주부가 되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자동으로 엄마 역할을 잘 알고 실천할 수 없는 것처럼.


1-2년 하고 그만둘 수 있는 일도 아니라 이대로 둘 순 없었다. 나와 내 가족에게 맞는 살림 최적화가 필요했다. 내 몸상하지 않고, 나의 내면에 집중할 시간을 만들며, 두 살배기 아들과 일에 쩌든 남편을 잘 보살필 수 있는 업무체계 말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쳤을 무렵, 난 살짝 닭살이 올랐다. "그래, 살림도 일이네." 경험해보지 않았던 일을 곧장 해야 됐던 때를 생각해 보았다.



안 하던 일을 곧장 어떻게 해냈더라?

문득 예상치 못하게 채용업무를 맡게 되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이미 퇴사한 채용담당자가 남긴 인수인계서를 보고 상사에게 몇 가지 전달사항을 받고 셀프 온보딩을 했던 날이었다. 그날 첫 번째 한 일은 Recruit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본 것이었다.

recruit의 사전적 정의

초반 3개월 동안은 내 업무페이지 최상단에는 위 사전적 정의가 박혀있었다. 업무의 본질을 깨닫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스타트업의 채용은 '포지션을 오픈하고 이해관계자를 (몹시) 설득하여 조직을 구성하는 일' 그 자체였다.



초보 안주인을 위한 JD

사전에서 '살림하다'를 찾아봤지만, '한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다'라는 포괄적인 설명뿐이었다. 결혼 6년 차에 접어들고, 애가 두 살이라 어디 묻기도 민망해 ChatGPT에 '살림을 한다는 게 뭐냐고'물었다.


그는 '단순히 집안일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넘어, 가정의 생활을 책임지고 관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이어진 부연 설명을 바탕으로 마치 JD를 쓰는 것처럼 해야 할 일을 나누어 적어 보았다.


일상적인 집안일

청소, 빨래, 식사 준비, 설거지 등 기본적인 가사 돌보기

식재료, 생활용품 등 구매관리

재정 및 자원관리

가족 예산을 짜기, 지출과 수입을 관리 등 ‘살림살이’를 효율적으로 운영

절약, 저축, 투자 등을 통해 알뜰살뜰히 경제적 안정을 도모

가족 돌봄

우리 가족의 육체적 건강과 정서적 안정 제공

부모님, 형제자매의 안부 체크

집안 분위기 조성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짧은 루틴 구성

가족 및 지인과 함께하는 활동, 나들이, 여행 계획

시즌이나 이벤트에 따라 집 꾸미기


쭉 써놓고 보니 살림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일을 잘 처리한다’가 아니라, 가족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생활 전반을 돌보는 마음과 태도를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은 시작의 이름

오늘 오프보딩을 위한 거의 모든 것을 마쳤다. 이번 주 중으로 GA Manger가 퀵을 보내면, 맥북과 충전기만 반납하면 된다. 퇴사일은 2월 말일. 졸업의 달에 퇴사를 하고,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부터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많은 이들이 끝을 맺고 시작을 맞이하는 때를 함께해서 인지 외롭지 않고 좋다.


지난 6개월 동안 아이와 함께한 소중한 순간들이 내게 큰 가르침을 주었고, 살림이라는 작은 우주 안에서 가족과 함께 성장하는 법을 배웠다. 물론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제 '김주부'이자 '김작가'로서, 새로운 챕터를 당당하게 열어갈 때다. 끝이 있어 새로운 시작이 있기에 두렵지 않다. 앞으로의 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