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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제 Mar 20. 2020

문자 경쟁

우리 사회는 경쟁이 심하다. 무슨 일이든 1등과 2등, 그 아래를 구분하고 비교하는 일이 잦다. 한글에 자긍심이 많은 사람 중에는 한글과 다른 문자를 비교하여 한글이 과학적이고, 우수하고, 최고의 문자라고 말한다. 물론 나도 국내외 문자 연구자가 한글을 높게 평가하면 괜히 뿌듯하고 으쓱해진다. 하지만 한글이 ‘가장’ 우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문자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의 대화에는 끼고 싶지 않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자연환경과 문화와 관념 속에서 인간의 집단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숭고한 문자는 각각 고유한 특색이 있는데 이를 놓고 최고를 가르는 일이 불편하다. 


문자는 크게 소리글자와 뜻글자로 구분할 수 있다. 소리글자는 소리를 기호로 표기하는 방식으로 배우고 익히기 수월하며, 한글, 라틴알파벳, 일본 가나 등이 있다. 뜻글자는 의미를 압축해 표기하는 방식으로 같은 지면에 많은 정보를 담는데 탁월하며, 대표적으로 한자가 있다. 문자의 기능을 소통과 저장이라고 한다면 한글과 같은 소리글자는 ‘소통’ 기능이 뛰어나고, 한자와 같은 뜻글자는 ‘저장’ 기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다.


문자는 대부분 너무 오래전에 만들어져서 누가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래서 오래된 문자에는 흥미로운 신화가 있다. 반면 한글은 만들어진 때와 만든 사람이 밝혀져 있어서 신비로운 신화가 없는 대신 한글 창제의 배경과 목적, 제자 원리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문자에서 이야기의 소재를 찾을 때, 흥미로운 부분이 서로 다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문자는 서로 생김새가 다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라틴알파벳은 곡선이 가지런하게 반복되어 깔끔하고, 한자는 강약과 완급이 있는 풍경을 보는 듯하다. 그렇다면 한글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명조체(바탕체) 혹은 고딕체(돋움체)를 떠올릴 것 같다.— 네모틀 안에서 자소(자음, 모음 글자)가 일정한 위치에 있어서 단정하고 담백해 보이지만 조금 건조하고 심심하다. 그런데 이렇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각 문자의 이미지는 고정관념처럼 자리 잡은 글자체의 모습일 뿐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글자체보다 훨씬 다양하다. 비교적 역사가 짧은 한글 역시 여러 모습을 갖고 있다. 한글은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기하학적인 도형인 직선과 정원으로 표현되어 단호하고 강직해 보이고, 조선 중기의 한글 서간체는 물 흐르듯이 유려하고, 조선말의 해서체는 단아하고 정갈하다.


문자는 저마다의 성격과 개성이 있다. 구태여 어떤 문자가 우수하고 아름다운지 비교하고 등수를 매겨서 ‘최고’라는 수식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럴 시간에 각 문자의 고유한 멋을 감상하자. 누군가 한글이 우수하다고 말하면, 그냥 한 번 부끄럽게 웃으면 된다. 그리고 다른 문자의 멋진 모습에 대해서 한마디 덧붙이면 더욱더 좋겠다.


읽으면 좋은 책:: 

제프리 샘슨(Geoffrey Sampson), 『세계의 문자체계』. 신상순(번역) (한국문화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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