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활자 생태계
최근 흥미로운 한글 활자체가 많아졌고 많은 활자 디자이너가 눈에 띈다. 과거에도 많은 활자체가 만들어졌지만, 기존 활자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비슷한 활자체가 많았다. 활자 디자이너도 스스로 자신을 알리려는 생각이나 의지가 크지 않았고, 알릴 방법도 제한되어 있어서 대부분 사용자는 활자 디자이너를 몰랐다. 활자 디자이너 사이의 교류를 암묵적으로 경계했고, 그들의 만남을 불편한 시선으로 봤다. 폰트 회사는 활자체 제작 과정에서 행여나 아이디어와 형태가 유출되어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활자체를 만들지 않을까 걱정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폰트 시장에서는 서로 비슷한 모습이나 콘셉트의 폰트 제작이 빈번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불신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활자 디자이너와 사용자인 디자이너의 관계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폰트(활자)를 판매하는 사람은 회사의 영업 담당자였고, 사는 사람 역시 디자이너가 아닌 인쇄소와 출력소였다. 활자 디자이너와 사용자가 만날 일이 없었고, 서로 알지 못했다. 활자 디자이너는 사용자의 요구를 알 수 있는 경로가 적었고, 반대로 사용자 또한 활자(폰트)에 대한 제작 의도와 적절한 활용법을 알기 어려웠다. 관행처럼 선배가 사용한 폰트를 후배가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글 활자 생태계에 큰 변화가 생겼다. 활자 디자이너는 과거보다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태도로 작업하고, 활자체도 흥미로워졌다. 활자 디자이너 사이의 교류도 많아졌고, 공개된 장소에서 미완의 활자체를 소개하기도 한다. 활자 디자이너와 사용자 사이에서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협업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과거에 비해 달라진 현상이다.
이제 활자 생태계의 오래된 문제인, 활자체의 유사성에 대한 걱정이 모두 해소된 것인가? 아니면 유사성에 대해서 관대해진 것인가? 사용자는 한글 폰트에 관한 이해가 높아졌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 변한 것 없이 한글 활자 생태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활자체의 유사성은 증명하기도 어렵고 인정하기도 어려운, 복잡한 문제이기에 활자 디자인 분야의 오래된 숙제이다. 어쩌면 풀지 않은 숙제일 수도 있다. 활자체의 유사성은 판단하기 모호해서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증명한다 해도 모두의 동의를 받기 어렵다. 그리고 나 자신도 언제든 유사성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어서 글자체의 유사성에 대해서 선뜻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 심지어 한글 활자 디자이너가 몇 명 되지 않다 보니 대부분 알 수 있는 관계라서 불편한 말을 하기 꺼린다. 불편함을 참고 살고 있을 뿐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글 활자체의 유사성 시비는 여전하다.
한글 활자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되고, 사용자와의 협업을 통해 활자체의 품질을 향상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활자 디자이너가 활자를 소개할 때 ‘누가 어디서 어떤 매체를 통해서 볼 것인가?’, ‘사회·역사·문화의 맥락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밝혀 준다면 좋겠다. 모호한 정체성의 활자가 많아지는 것은 한글 활자의 품질을 향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활자체의 유사성 시비는 결국 우리의 손해고 미래의 손해다. 더 다양한 양질의 활자체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로막고, 활자에 대한 신뢰도를 손상하고, 활자 디자이너의 생명을 단축하고, 한글 폰트의 품질을 서서히 나빠지게 하고, 결국 폰트 시장과 한글문화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활자 디자이너와 사용자 사이의 교류와 협업은 한글 활자 생태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풀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진 않을까. 활자 디자이너는 자신이 만든 활자체의 가치와 제작 배경, 사용할 때의 특징 등을 협업자인 사용자에게 설명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활자 디자이너와 사용자 모두 활자체에 대해서 더 정교한 이해를 갖추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계속 유지된다면 활자체의 유사성이 걸러질 수 있고, 품질 또한 점진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믿는다. 사용자는 사용 목적에 맞는 한글 폰트를 선택하고, 나아가 사회에 필요한 한글 폰트를 활자 디자이너에게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한글 활자 생태계는 과거에 우리가 정한 미래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미래의 한글 활자와 한글 활자 생태계가 결정된다. ‘결정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노력을 기대한다.
삼원 페이퍼 »삼원 같이의 가치 TypeKit 2020«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