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마녀체력 님의 [미리, 슬슬 노후대책]을 읽고
이영미 (마녀체력) 작가님을 (지면으로) 만난 건 벌써 5년 일이다.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그 당시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을 위해 토요일마다 토요한글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국어로 실컷 떠들고 놀며 재미있는 한국어 콘텐츠도 즐길 수 있고, 나 역시 싱가포르 한국학교의 작은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며 한국어 책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어서 토요일 오전은 항상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나는 이영미 작가님의 첫 번째 책, 마녀체력을 만나게 되었다. 그 책을 만났던(읽던)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작은 시골 분교와 같은 아늑한 도서관에서 한글로 쓰인 책을 여유롭게 읽는 느낌이라니!! 게다가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내용을... (읽으면서 하도 고개를 끄덕여서 나중엔 목이 뻐근할 지경이 되었다.) 책을 잡고 단숨에 다 읽은 후 대여까지 하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작가님의 이메일을 찾아 마치 러브레터와 같은 나의 독후감을 메일로 보냈다.(다시 보낸 메일함에서 찾아 읽어보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사실 답장을 기대한 것도 아니고 (인기 작가이실 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저 책을 읽고 느낀 나의 흥분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메일을 보내고 바로 다음 날 노르웨이에서 트래킹 중이던 작가님께서 바로 답장을 보내어 한국에 오면 만나자고 초대까지 해 주시니 그때 나의 기분은 마치 BTS한테 개인 답장을 받은 아미의 그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 인연을 시작으로 한국에 갈 때마다 매번 작가님을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묻고 식사를 하고 마치 나의 멘토처럼, 언니처럼(?) 그런 관계로 지내왔다. 물론 이후 나온 작가님의 책들도 모두 사서 친필 사인까지 받아 집에서 귀하게 읽고 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책, [미리, 슬슬 노후대책]의 블라인드 서평단을 모집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건 나를 위한 거야! 내가 누구보다 잘 쓸 수 있어!'라는 팬심으로 신청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선발까지 되어서 작가님의 신간을 미리 읽어 볼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역시나 이번 책도 나의 취향 저격! 읽으면서 밑줄을 쫙쫙 그어가며 나의 만트라로 삼을만한 부분, 사 보고 싶은 책, 영화 등을 모두 표시해 놓았다.
사실 나는 자기 개발서, 영어로는 self-help book을 잘 읽지 않는다. selp-help라 하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성찰하고 스스로의 삶을 반영해 보는 과정이 중요한데, 나는 자기 개발서를 읽으면 오히려 자기 성찰에 방해를 받는다. '이런 당연한 말을 당당하게 써 놓다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영미 작가님의 이번 신간, [미리, 슬슬 노후대책]은 에세이에 가깝다. 고령화 시대에 날마다 생겨나는 화두를 작가 자신의 직접 경험과 책, 인물, 영화 등을 통한 버무려 컬러풀하고 다이내믹하게 풀어가고 있다. 공감을 이끌어 내며 영감을 준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와닿았던 부분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쫀득한 관계: 내가 맺고 싶은 쫀득한 관계는 약한 사람들끼리 꼭 잡은 손이다. 가족에게는 때로 남처럼, 남에게는 종종 가족처럼 대하는 현명함이다. 부부이자 동지로 살면서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사십 대 중반이 되고 문득문득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인간에 대한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특히 해외에 살다 보니 내가 속한 커뮤니티는 작고 제한적이라서 그 안에서 질 높은 인간관계를 즐기려면 접근 가능한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이 책의 작가는 가족 관계부터 재정립하라고 권한다. 즉 늘 옆에 있는 가족과의 관계를 때때로 의도적으로 (재)정비하고 서로의 의미를 점검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노후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남편과의 관계, 아이들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다. 즉 나와 남편은 맡은 업무의 범위나 종류에 따라 가정 내에서 다른 역할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결혼한 직후, 아이가 하나 있을 때, 또 둘째가 태어났을 때, 학부모가 되었을 때, 둘 중 하나가 단기, 장기로 해외 출장을 떠나 물리적으로 자리를 비워야 했을 때 등, 남편과 나의 관계는 매우 다이내믹하게 변하고 있었다. 각각 다른 상황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서로에게 암묵적인 기대가 달라졌던 것 같고 이렇게 달라진 기대를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않았을 때 꼭 문제가 생기곤 했다. 작가는 그 관계에 대해서 인지하고 성찰하며 대화를 나누기를 제안한다. 게다가 그 제안은 다양한 책과 영화,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여 있으니 남의 어려움에 웃고 (나의 문제 아니라서) 또 멋진 가족 관계를 부러워하며 나도 모르게 그 입장에 나를 투영해 보았다. 우리 부부도 곧 아이들이 떠난 가정에 둘만 남게 될 것이고 또 은퇴도 할 텐데, 그때마다 우리의 관계를 매번 점검하고 재정의하며 서로 건강한 토론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새로운 외국어를 익혀 폼 나게 써먹기
작가는 은퇴 후에 일본어를 배웠던 경험을 공유하며 일본어를 배움으로써 얼마나 삶이 풍부해졌는지, 또 그로 인해 접근 가능해진 기회와 즐길거리가 얼마나 다양해졌는지 시시콜콜 다 털어놓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이야 말로 내 전공 지식에 기대어 '맞아, 맞아'라고 혼자 외치면서 읽었던 부분이다. 이중언어 학자로서 말하자면, 이영미 작가님은 50대부터 일본어를 배우고 활발하게 사용하시는 순간 치매에 걸릴 확률이 현저히 낮은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든버러 대학의 박(Bak) 교수 (한국 사람 아님 주의) 팀의 다양한 연구에 따르면 노년의 외국어 학습/구사는 알츠하이머가 발현되는 나이를 현저히 늦춘다고 한다. 이것은 그저 두 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것보다 노년에 새 언어를 배우는 경험 자체가 알츠하이머 발현 나이와 유의미하게 관계가 있다고 하니 작가의 노후에 외국어 익히기 계획은 실로 과학적이고 실제로도 건강에 도움이 되는 계획이다. 동기 부여가 잘 안 된다고? 일단 다음 단락을 읽어 보면 노년의 외국어 학습이 얼마나 여러 모로 쓸모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관광객 말고 여행 생활자로 머물기
코로나 기간 동안 여행 못 가서 좀이 쑤셨던 사람??? 내게는 일 년에 한 번 이상 반드시 솔로 여행을 하며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이 소소한 행복이며 인생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랄까? 그랬다. 그런데 코로나 기간 동안 여행을 못 가니 정말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때 읽었던 책이 알레스티어 험프리의 [모험은 문 밖에 있다.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일상 속 마이크로 어드벤처 (Micro adventure: Local Discoveries for Great Escapes]였다. 험프리 역시 이영미 작가님처럼 자전거로, 트래킹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던 모험가였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특별한' 모험에 대한 성찰을 하며 꼭 특별한 경험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사는 일상 자체가 모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책에서 언급한 어드벤처 중 그다지 '마이크로'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이 책을 읽고 날마다의 일상을 더욱 관찰하고 느끼고 의식하려고 노력하면서 팬데믹을 무사히 넘겼던 기억이 난다.
[노후대책]에서 작가는 반대로 미루지 말고 원하던 여행을 떠나라고 권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여행 생활자' 역시 장소를 바꾸어 거기에서 마이크로 어드벤처를 즐기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여행을 떠나기는 하지만 거기에서 '관광'을 하지 말고 소소한 일상을 '낯설게' 지내 보라는 작가의 권유가 매우 매력적이다. 이런 마음으로 여행을 떠난다면 새로운 곳에서 장을 보는 것도, 밥을 해 먹는 것도, 우체국에 가는 것도, 버스를 타는 것도, 게다가 이 모든 것을 다른 언어로 하는 것이 모두 낯설고 가슴 떨리는 경험이 될 테니.......
이번 책은 마침 양가 부모님들이 노후대책에 대해서 고민하시는 것을 한참 들어드리던 차에 읽게 되어서 구구절절 공감이 더 되었던 것 같다. 나름 준비를 많이 하셔서 꽤 평안해 보이기는 하지만 예상치 못했던 소소한 걱정거리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난 부모님께 이 책을 선물로 드릴 계획이다. 이미 70대를 훌쩍 넘으셨지만 요즘 같은 백세 시대에 작가가 제시하는 노후대책을 읽으며 이미 닥친 노후의 삶 안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의미를 찾으실 수 있기를……. 결국 이 책을 읽고 보니 '노후'라는 시간이 내게도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의 노후는 지금 중년의 삶보다 더 바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