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쇼핑의 체크리스트: 입증책임과 증거
특허 쇼핑에서 득템하기 위한 방법 - 괌 쇼핑의 나비효과. 입증책임과 증거 이야기.
추석 연휴에 가족과 괌 여행을 다녀오며 있었던 일이다.
괌은 에머럴드 바다 바로 옆에 득템의 찬스가 널려 있는 쇼핑몰이 즐비하게 서 있는 매력적인 여행지이다. 자본주의의 메카인 미국의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도, 태평양의 중심에서 미국과 동남아의 정취가 어우러진다. 미국에서 가장 해가 빨리 뜨는 곳이기도 하다.
휴양과 쇼핑을 모두 즐길 수 있어 한국 여행객들에게 특히나 인기가 많다. 여행의 묘미는 바다에서 수영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 무릇 쇼핑몰을 한 바퀴 돌면서 배가된다.
점원은 진열매대에 올라와 있지 않은 상품 사진을 보여주며 한국에서 온 관광객의 득템 욕망을 자극했다. 1달러당 1500원을 바라보며 끝없이 높아져 가는 환율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는 솔깃한 말 한마디에 "결제해 주세요"라는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수순이다.
매출을 올린 점원도 즐겁고 신상을 득템 한 우리 모두 즐거웠던 경험으로 남아 있다.
해프닝은 그다음에 발생했다. 공항에서 환전해 간 1000달러를 결제하며, 거스름돈을 깜빡했던 것이다. 카드 결제에 너무 익숙해졌던 것일까. 같이 갔던 일행 모두 자연스럽게 매장을 빠져나왔다. 매장을 나와 쇼핑몰을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뭔가 빠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매장에 다시 돌아가서 거스름돈을 못 받았다고 말할까", "점원이 줬다고 말하면 어떻게 증명하지?", "CCTV를 확인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아니야, 1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를 기억할 거야"
현금으로 쇼핑할 때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실수로 잔돈을 돌려받지 못했다면, 사정을 설명하고 돌려받으면 되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손쉽게 해결될 문제이지만, 외국에서 실랑이를 할 생각에 여러 시나리오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점원이 기억을 못 하거나 잔돈을 돌려주었다고 이야기한다면? 진실은 어떻게 되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
물론, 상황을 설명하고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는 결말로 끝났다. 하지만, 사소한 해프닝에서 직업병이 도졌다. 일상에서 곤란한 상황이 생겼을 때 "입증 책임과 증거"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 그 누구도 완벽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한 혼돈의 상황에서, 누구의 말에 손을 들어줄 것인지의 문제이다.
10년 지기 친구라면 내 말을 더 들어줄 것이고, 나를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면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가능성은 낮다. 매번 법정으로 찾아갈 수도 없다.
특허 분쟁이나 법적인 쟁송에서도 "누구의 말을 더 믿어 줄지"의 문제가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이다.
지인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갚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카카오톡의 대화 내역이 있다면 문제는 손쉽게 해결된다.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계좌의 송금 내역을 보여주면서 금전 대여의 정황을 보여줘도 된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어도, 다른 간접적인 증거들이 충분히 역할을 한다. 직접 증거이든 간접 증거이든 결국 증거가 있다면 다른 이야기를 하는 상대방을 꿀먹은 벙어리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10만 원을 현금으로 빌려줬다면? 돈을 빌려준 것이 맞지만, 내 말을 믿어줄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면? 조금은 억울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돈을 빌려간 지인이 발뺌을 하는 경우에는 누구의 말을 믿어줘야 할까? 우리가 판사님이 되었다면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둘 다 억울하게 호소한다면 그 상황을 지켜보지 않았던 제3자가 어느 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기는 난처해진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돈을 빌려준 증거'를 제시하며 돈을 돌려달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반대로 돈을 빌린 사람이 '돈을 빌리지 않은 증거'를 제시하면서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해야 할지의 문제도 있다.
각자가 선의로 이야기하더라도,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도 미묘하게 시각이 달라지기도 하고, 서로 다른 기준을 가진다면 객관적 진실을 찾아 나서는 길은 더욱 길어진다. 법률 분쟁이 인공지능(AI)을 통해 정답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양 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복잡한 법률 분쟁에서는 치열한 공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국 누가 증명할 것인지, 증거가 있는지에 따라 상황이 급변하기도 한다.
각자의 사정과 모호한 사각지대들이 있기 때문에, 대여금 반환청구권과 같이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증명책임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돈 받을 사람이 그 권리를 증명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지인을 믿고 돈을 빌려 주고도, 이를 증명하는 수고로움이 생긴다.
하지만, 돈을 빌리지 않은 사람에게도 대여금이 있다고 악용하는 경우와 같이 법률 분쟁에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일정한 기준이자 사회적 합의를 증명책임이라는 법리로 정해둔 것이다.
특허 쇼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허를 잘 획득하고, 내 사업을 잘 보호하는 특허 쇼핑의 국면에서 신상품과 함께 만족스러운 귀가를 하기 위해서는, "나중에 특허를 활용할 때 내 말에 설득력이 있을지"를 미리 고민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는다면, 기껏 쇼핑해 온 특허를 활용하지 못하거나, 거스름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허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좋은 기술을 발굴하고 이를 권리로 만드는 것이 특허 쇼핑이다. 내 사업을 지키고, 가치가 높은 특허를 획득하는 것이 특허 쇼핑에서 득템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허 쇼핑은 아웃렛의 폴로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티셔츠를 고르는 것보다 섬세한 노력이 필요하다. 내 특허를 사용하려고 봤더니, 또는 이전의 특허 쇼핑 내역을 봤더니 내 기억과 달라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쇼핑한 특허에 따라 입증이 쉬워지기도하고 어려워지기도 한다.
특허를 쇼핑한 구매자에게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후회의 순간은 누군가 나의 특허 기술과 비슷한 제품과 서비스를 출시했을 때 다가온다. 만족스러운 특허 쇼핑이었는지는 뒤늦게 알게 된다.
특허 분쟁에서도 "상대방이 내가 가지고 있는 특허 기술을 모방하였다"라고 이야기할 때, 입증책임과 증거를 항상 고려하여야 한다. 거스름돈을 받기 위해서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여야 하는 것과 같다. 적어도, "우리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까먹은 것 같아요"라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A. 제품과 서비스의 특성에 따라서 입증의 난이도가 달라진다.
어떤 OTT 기업이 사용자의 영화 취향을 반영하여 추천 영화를 분석하는 소프트웨어(SW)를 개발하여 특허를 획득했다고 생각해 보자. 스포츠와 액션을 좋아하면서도, 어느 때에는 지인들의 추천을 받아 로맨스 영화를 볼 가능성이 높다면 이전 시청이력과 연령대, 그리고 SNS 트렌드를 반영하는 개인별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여 시장 점유율을 높여나갈 수 있다.
특허 쇼핑도 성공해서 많은 특허를 가지고 있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 경쟁 OTT 업체가 같은 추천 방식을 사용하는 경우, 이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의심이 들 때마다, 경쟁 OTT 업체의 서버를 열어볼 수도 없고, 스파이 직원을 심어 IT 부서를 파헤쳐볼 수도 없는 일이다.
영화 추천 알고리즘과 같이 컴퓨터나 프로세서 등 연산 동작을 수행하는 소프트웨어 특허는 침해 입증의 난이도가 높아진다.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기술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볼 수도 없고, 알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일수록 특허 침해 탐지의 확률은 낮아진다.
반도체 장비를 만드는 기업의 경우에도, B2B 비즈니스의 특성에 따라 기업들 사이에서 일어지는 일을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빈번하다. 반도체 공정이 국가 기밀로 관리될 정도로 엄격한 통제 하에 있다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도 '결정적 증거' 하나를 찾는 것이 힘들다.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을 찾기는 쉽지 않다.
상대방이 내 특허를 침해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특허를 가진 권리자가 특허 침해 사실을 입증하고 증거를 제시하기까지는 여러 관문을 거쳐야 한다. 상황을 해결할 결정적 증거로서 스모킹건이 없다면, 의심이 되는 정황증거를 수집하여 싸움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문을 줄이기 위하여, 특허권자들은 침해 입증이 쉽도록 하드웨어(HW)의 관점에서 특허 문서를 쓰거나, 상대방의 제품 입수가 용이한 특허로 쇼핑 리스트를 바꾸기도 한다. 비슷한 가격에 좋은 성능을 가지는 제품으로 대체하는 합리적 쇼핑이다. 디스커버리 제도가 잘 정립되어 있는 미국 등의 국가를 소송 대상국가에 포함시키는 우회전략을 쓰기도 한다.
B.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를 논의하고 있는 이유
국가 핵심기술을 개발하던 연구원이 거액을 받고 해외에 팔아넘겼다는 기사가 종종 보인다. 상대 기업이 좋은 제품을 만들면, 슬쩍 비슷한 제품을 출시하고도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개발 자료이나 판매 정보를 숨기기도 한다. 법정에서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기술을 개발하고도, 특허를 획득하고도, 상대방의 특허 침해 사실을 알면서도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소송에서 지는 모습을 자주 접한다.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고도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대여금을 반환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연이 오버랩된다.
이러한 현행 제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논의되고 있는 제도가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이다. 영미 소송법에서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서류나 증거를 발견(discovery)할 수 있도록 상호 간에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디스커버리 제도를 국내 현실에 맞게 들여오자는 취지이다.
기업의 기술 유출을 막으면서도, 정당한 특허권자를 보호하기 위한 시도이다. 제도가 도입된다면 특허 쇼핑을 마친 소비자가 내 특허 기술을 손쉽게 보호받을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괌 쇼핑에서 시작된 해프닝의 나비효과가 특허 분쟁까지 이어졌다. 결국, 내가 가진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입증책임과 증거를 미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다.
모든 법률 분쟁이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허를 획득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특허권자에게 특허 쇼핑 체크리스트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글. 손인호 변리사. Copyright reserved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