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작별인사」
학교는 20세기의 산물이며 21세기 초반에 그 유용성을 이미 상실했다는 것이다. "과거에 학교는 일종의 수용소였단다. 부모들이 직장에 나가 일할 수 있도록 나라가 맡아주었던 거야. 피가 뜨거운 십대들을 모아놓았으니 늘 문제가 생겼지."
코로나 이후 비대면 강의가 각광받고 있습니다. 교육청 대부분의 강의도 비대면 강의가 주를 이루고 있죠. 사실 마음만 먹으면 유튜브나 온라인 오픈 강좌 또는 책으로 얼마든지 혼자 공부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어서일까요. 김영하의 「작별인사」라는 소설 속, 학교의 쓸모는 부모가 일하는 동안 아이를 맡아두는 수용소 정도로 묘사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인류의 오래된 지혜들을 꼭 배워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세상이 빨리 변해도 변치 않는 것이 있고,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도 인류가 이룩해온 문명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수업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진도는 매우 느릴 수밖에 없었다.
문명이 과학의 단계로 도약했지만 사유 수준이 기술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그 국가는 결코 앞서갈 수 없다는 최진석 교수님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기술이 빠르게 진화해도 그것을 과학과 철학의 높이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쩌면 소설 속 '철이'의 아빠, 최진수 박사는 그런 능력을 갖춘 인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철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이유도 보다 본질적인 것을 탐구하고, 깊이 생각할 틈을 주기 위함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철이는 안온한 공간 밖의 세상을 동경했습니다. 자기 또래 친구들의 삶이 궁금했고, 학교라는 곳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어머니가 없는 게 이상했지만, 아버지만으로 부족하냐는 물음에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답한 이유는 자신의 교육 방식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아버지가 상처를 받을 게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겪을 마음의 고통을 짐작하고, 죄책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는 사실 인간의 편리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를 휴머노이드가 바라고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스스로 진화하는 기계 승리의 예측은 불행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철이는 혼란스럽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원망스럽습니다. 왜 쓸데없이 기분과 감정을 느끼게 하는 기능을 넣었는지... 왜 눈물이 흐르도록 만들어졌는지...
공장 초기화를 한 뒤에는 완전히 새로운 기억을 한 세트 넣어줘요. 아주 즐겁고 행복한 것들로만요. 인간들이 참 무정한 게, 자기들은 어둡고 우울하면서 휴머노이드는 밝고 명랑하기를 바라거든요. '자의식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확고하면서 생각이 많은 휴머노이드 주세요'하는 고객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어요.
사색적이고 진지한 휴머노이드를 만들지 않겠다고 판단한 회사와 대척점에 있는 최 박사는 몰랐을 것입니다. 자기주장이 하늘을 찌르며, 허락을 구하는 말에 다른 의견을 낼라치면 자기 논리로 응수하며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바를 기어코 관철시키고야 마는 자의식이 날로 날로 강해지는 사춘기의 철이를 겪기 전이었으니까요.
부모란 타이틀이 이렇게 억울한 적이 있었을까요? 내가 늙었을 때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아이를 낳아야겠다 결심했다면 딩크가 차라리 나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양육 보조금을 타거나 청약 1순위에 눈이 멀어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했다면 그건 분명 부모의 이기심 때문이겠죠. 이미 존재하는 나를 위해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를 필요로 한 것이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저는 '선이'의 사생관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주의 먼지가 어쩌다 잠시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해 의식을 얻게 되었고, 이 우주와 자신의 기원을 의식하게 되었다'는 말이... 우린 애초에 누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휴머노이드가 아니니까요.
인간은 무엇인지, 인간적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 마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어디까지를 기계로 볼 것인지, 인간에게 영생은 재앙인지 축복인지, 생의 끝자락에서도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 한 가지는 무엇일지... 책을 덮으며 떠오르는 물음들은 앞으로 우리가 그리고 제가 하나씩 답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