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임신 16주부터는 임신 중기로 들어서면서 상대적으로 ‘안정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때쯤 되면 입덧이 사그라들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임신 초기 유산의 위험도 줄어들면서 이 시기에 태교 여행을 다니는 임신부들이 많다. 그래서 나도 많이 들떠서 매일 유튜브에 제주도 태교여행 같은 걸 검색하면서 바다를 보러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비행기를 타야 싼 지, 언제쯤 관광객이 적을지를 계산하면서 가고 싶은 숙소를 핸드폰 메모 2장 넘게 가득 채워놓곤 했다.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오면 언제쯤 안 바쁜 시기가 와서 연차를 몇 개 쓸 수 있는지를 물어보며 수없이 여행 계획을 짜곤 했다. 몸에 느껴지는 입덧이 사라져 가자 이제는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만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임신 15주가 되기 전까지는 초음파를 보지 않고 아기의 심장소리를 듣거나 아기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래서 가정용 태아 심초음파 측정기를 사서 임신 초기 정기 검진 사이에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남편과 작은 아기의 위치를 추론하며 열심히 기계를 켜서 작고 빠르게 뛰는 아기의 심장소리를 듣곤 했다. 너무 자주 태아를 초음파에 노출시키는 것도 좋지는 않다고 하여, 안전한 주파수지만 궁금해도 너무 자주는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쿠쉬쿠쉬-‘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뛰는 아기의 심장소리를 듣는 것은 아기가 건강히 잘 있구나, 하고 안심하면서도 아기를 느끼는 하나의 수단이 되어주었다. 임신부 본인의 몸 상태가 좋지 않거나, 아기가 너무 궁금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동네 산부인과라도 가서 초음파를 자주 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임신 16주에 접어들면서,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기계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아주 이르면 16주부터 태동을 느낀다고는 하지만, 19주는 되어야 느끼는 사람도 있어서 첫 태동의 느낌이 그렇게 강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평소처럼 늦잠을 자고, 뒤척이면서 안방 커튼 사이로 드는 햇빛을 구경하며 언제쯤 일어나 볼까 고민하고 있었던 16주 3일 차의 늦은 아침시간이었다. 배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진 똑바로 누울 수 있는 시기여서, 똑바로 누워 기지개를 켜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랫배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분명히 소화기관이 움직이거나 가스가 차서 움직이는 느낌과는 달랐고, 뱃속에 작은 금붕어가 수면에 튀어올라 꼬리를 탁탁 치는 느낌이었다. 나도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느낌이라 너무 놀라고 신기했는데, 그 작은 아기가 자기도 사람이라고 그렇게 존재감을 뽐내는 것이 웃기고 귀여웠다. 그 이후로도 태동이 그렇게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종종 꼬물꼬물 하는 아랫배의 움직임이 느껴지면 가만히 누워서 아기가 뭘 하느라 이렇게 움직이는 것일까 생각하곤 했다. 태아의 신경계가 발달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아기가 뭔가 생각을 하면서 움직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혼자 생각하기도 했다.
임신 16주에는 2차 기형아 검사와 정기 검진이 있었다. 첫 태동의 기쁨과 임신 안정기에 대한 희망으로 이미 기형아 검사 결과에 대한 걱정은 사라져 있었고, 14주에 애매하게 답을 들었던 아기의 성별이 최고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임신 초기를 지나 중기로 온 것이 눈으로 실감이 될 정도로 배가 동그란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고, 임신부로서의 나에게 조금 더 익숙해졌다. 입덧을 하면서 줄어들었던 몸무게도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다양해지자 마음도 함께 여유로워졌다.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16주 차에 병원에 갔고, 그런 마음이 들어서였는지 주치의 선생님이 휴가를 가셨다는 말에도 불안하지 않았다. 대신 날짜를 맞춰서 2차 기형아 혈액검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의사의 진료를 보기로 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산모의 안전을 위해 병원에서 보호자 출입을 통제하던 중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진료를 볼 수 없어서 혼자 택시를 타고 그저 아이의 성별을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나는 처음 진료를 보던 선생님이 주치의 선생님보다 초음파를 길게 볼 때에도, 그저 성별을 좀 더 확실히 봐주시려고 하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과거 병원 경력을 되살려 초음파를 함께 보면서 나는 태아의 다리 사이에만 신경을 쓸 뿐이었다. 초음파를 다 보아갈 때쯤 조심스레 이번 주에는 아이 성별을 알 수 있다던데, 하고 말을 꺼내자 다리 사이에 보이는 게 없으니 딸일 확률이 높다고 알고 계시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내심 계속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원하는 답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져서 다른 것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초음파를 다 본 후 진료실 상담 의자에 앉아 마주한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별로 밝지 않았다. 나는 처음 보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저 원래 진지하게 말씀을 하시는 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세한 설명은 원래 진료를 보시던 선생님께 들으셔야겠지만, 태반이 아래쪽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아직은 임신 16주밖에 되지 않았고, 전치태반을 정식으로 진단 내리는 시기가 아니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신, 혹시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시고 가능하면 일을 쉬고, 운동도 근력운동이 아닌 스트레칭 위주로만 해야 하며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는 태반 위치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2차 기형아 검사를 위한 혈액검사를 받고, 19주 차에 원래 진료를 받던 선생님께 진료를 예약하고 다시 혼자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그저 태반이 좀 아래쪽에 있다는 것과 전치태반, 완전 전치태반은 차이가 있다. 자궁 입구를 태반이 얼마나 막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 것인데, 원래 태반은 자궁 위쪽에 붙어있어야 하나 자궁 입구에 자리를 잡으면 출산 전에도 통증 없는 출혈이 흔하게 생길 수 있고 출산 시에도 출혈이 많아 고위험 임신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태반의 위치가 아래쪽에 있다가도 주수가 차면서 정상 위치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고, 그런 경우 자연분만도 가능하기 때문에 16주에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출혈을 방지하기 위해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 불편할 뿐이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어차피 밖을 다니기 힘드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겠다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19주에 원래 진료를 보던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나는 긍정적인 미래를 계속 꿈꾸고 있었다. 솔직히 내가 전치태반까지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번이 첫 임신이었는데 교과서적인 전치태반의 위험군인 고령에 속하는 것도 아니었고, 원래 있던 자궁근종이 큰 것도 아니었으며 다태임신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체 임신부의 0.3%에 해당하는 전치태반이 내 진단명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자리잡기 전의 태반 모양이 아래쪽으로 쏠려있다면 전치태반이라고 부르지는 않기 때문에, 그 정도로 생각하고 집안일을 좀 더 적극적으로 남편에게 일임하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 무렵 임신 초기에 중단했던 재활 목적의 필라테스를 다시 다니고 있었는데, 배가 조금씩 동그랗게 나오면서 아프기 시작한 허리와 어깨 스트레칭과 근력 보강에 힘썼다. 대신 근력운동에 제한이 있어서 찌릿하게 통증이 오는 허리와 어깨, 목을 펴는데 집중했고 일을 하지 않으니 늦잠을 자고 컨디션이 좋을 때 가벼운 운동복을 입고 몸을 움직이면서 게으른 생활을 즐기려고 노력했다. 그 사이에 12주와 16주에 시행했던 기형아 선별검사는 모든 질병군에서 저위험으로 나와서 추가 검사가 필요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좋은 결과만 받아보았으니 19주에 주치의 선생님께 다시 초음파를 보면 다른 소견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조금씩 커지는 배를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막상 진료를 보러 가려니, 결과가 별로 좋지 않을까 봐 이번에는 혼자 가기가 조금 무서웠다. 진료일 전날 갑자기 병원에서 보호자 1인을 허용한다는 문자를 받았지만, 이미 남편이 휴가를 쓰기엔 늦은 시간이라 엄마에게 급하게 전화를 했다.
임신 중기는 안정기라 황금기랬는데, 제주도까지는 갈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가을에 배가 불러오면 태교여행 기분은 느끼고 싶어서 화담숲과 강원도 단풍이 유명한 숙소를 예약한 상태였다. 19주에 보는 진료에는 괜찮을 거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괜히 엄마랑 같이 가니까 더 좋은 얘기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가지고 주치의 선생님을 보러 갔다. 먼저 복부 초음파로 아기를 먼저 살펴보면서는 주치의 선생님도 아기가 잘 크고 있고, 성별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으며 아기에게 별 문제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복부 아래쪽에 자리잡기 시작한 태반을 질초음파로 다시 확인하면서는 말이 없어져서 두려웠다. 분명 아주 잠깐이었지만, 진료실로 돌아와 들은 이야기는 기대와는 아주 달랐다. 보통 19주에 전치태반을 완전히 진단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태반이 자궁 입구를 막고 있는 경우, 통증 없는 출혈이 있을 수 있어 운동과 활동을 제한해야 하고 위험을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주치의 선생님의 설명은 이 정도가 아니라, 아주 단호하게 ‘완전 전치태반’이라고 말씀하셨다. 걱정이 많은 나의 성격상 다니고 있는 병원에서 가장 수술 경험이 많은 분을 처음부터 지정해서 다니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경험상’이라는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덧붙인 말은, 본인의 경험상 내 태반 위치는 앞으로 변화가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 힘들고 무조건 수술로 분만을 해야 하는 케이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출혈이 있을 수 있고, 통증이 있든 없든 출혈이 생기면 무조건 병원으로 와야 한다는 말이 붙었다. 모든 종류의 근력 운동은 하지 말라고 했고, 정 몸이 아프면 스트레칭 정도만 할 수 있다는 말까지 붙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보니 병원에서 내 진단명을 ‘전치태반’으로 등록했는지 건강보험공단에서 ‘고위험 임신부’로 등록되어 입원하게 되면 진료비 지원을 신청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문자가 왔다.
더운 여름을 지나 가을을 기다리는 시기였고, 위험한 시기를 지나 산책도 많이 다니고 요리도 많이 해 먹고 여행도 가고 싶어서 부풀었던 마음은 다시 불안으로 가득 찼다. 나는 진단명을 받자마자 산부인과 간호사로 오래 재직하셨던 동료 선생님과, 나와 함께 일했던 간호사 출신 선생님들 중 출산 경험이 있는 분들께 연락을 했다. 물론 나를 봐주신 주치의 선생님은 산과 전문병원인 그 병원에서 충분히 출산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하셨지만, 대학병원에서 급하게 전원 받은 산모를 많이 경험했던 나로서는 그렇게 해도 될지 즉각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선 내 지인들은 전원을 하든 하지 않든 대학병원 진료를 받아볼 것을 권했다. 원래 내가 다니던 병원은 집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응급실이 없고 산과와 마취과에 당직이 있긴 하지만 산과적 응급상황에 얼마나 대응이 되는지 확인해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급할 때 구급차를 타고 들어갈 응급실이 있는 병원, 중증으로 급하게 진행될 경우 여러 과 협진이 가능한 병원에 진료기록을 만들어두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조언을 공통적으로 받았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점이, 정말로 쉬운 출산은 단 한건도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아서 그렇지, 임신 과정에서 위험한 상황을 겪거나 출산에서 타과 협진을 받게 되는 일이 생각보다 흔했다. 특히 한 선생님은 내게 전화로 2시간 동안이나 본인의 출산 경험담을 말해주면서 진지하게 전원을 권유했다. 들어보니 그분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 분만을 진행하던 중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해져서 일찍 대학병원으로 전원 하지 않았다면 감당되지 않았을 위험한 상황까지 갔던 경험이 있었다. 그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전원을 하든 하지 않든 대학병원 진료를 빨리 봐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다니던 병원에 대학병원 진료를 보러 가겠다고 말하자 주치의 선생님은 바로 진료의뢰서를 써주셨다. 이제까지 진료를 받았던 기록과 검사 결과 서류를 받아서 집에 가려고 하는데 원래 다니던 병원의 간호부장님이 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분은 내가 정말 전원이 필요한 시점이 오면 원하는 병원으로 전원을 해줄 수 있으니, 지금은 좀 더 다니던 병원을 다니고 가능하면 출산까지 하는 것이 어떻냐고 길게 설득을 하셨다. 내가 계속 진료를 봐오던 주치의 선생님께서 고위험 출산 경력이 많고, 현재 병원에서 완전 전치태반 수술도 감당이 가능하며 산후출혈에도 대응이 가능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그쯤 되자 나도 솔직히 내가 간호사 경력이 있고, 신생아 중환자실 출신이며 고위험 임신의 경우 조산 위험도 높은데 산과 선생님만 훌륭하다고 모든 상황에 대응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 생각해서 응급실이 있는 대학병원 진료를 보고 싶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화까지 하고 나자 이제는 진료 기록을 만들러 대학병원을 가는 것이 아니라 병원을 옮기는 순서로 자연스럽게 진행이 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해야 하는 일은 집에서 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에 고위험 산모를 주로 보는 교수님을 알아보고 외래를 잡는 일이었다. 여기서 거의 처음으로 나는 신생아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했던 인맥을 써먹게 되었는데, 내가 가려고 마음먹은 병원이 원래 내가 일했던 병원과 관계가 있는 병원이어서 어떤 교수님이 내 케이스를 잘 봐주실 수 있는지 아직 병원에서 일하는 동기를 통해 물어볼 수 있었다. 교수님을 빠르게 추천받고 예약센터에 전화를 걸어 진료를 예약하고 나자, 한편으로는 다른 소견을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그 진단이 맞더라도 좀 더 나은 대응을 기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열심히 전화하고 이리저리 알아보면서도 내가 바로 그런 ‘케이스’가 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원래 예약했던 산후조리원은 원래 다니던 병원에서 출산을 할 경우에만 입소를 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거기도 예약하기가 힘들었는데, 19주가 되어 병원을 옮기게 된 이 상황에는 또 다른 조리원을 알아봐야만 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전까지만 해도 예정일 전후로 출산을 하게 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는데, 고위험 산모가 되어버린 이상 조산과 이른 제왕절개 수술 일정도 고려해서 산후조리원을 예약해야 한다는 변수가 생겼다. 그래도 집에서 산후조리를 할 자신이 없어서 열심히 새로운 산후조리원을 알아봤다. 집과 다닐 병원이 멀어지자 산후조리원을 병원 근처로 해야 할지, 집 근처로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늦은 시기라 선택의 폭도 넓지 않았다. 병원 근처 산후조리원은 출산 후에 진료를 보러 가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병원과 가장 가깝거나 시설이 조금이라도 좋은 곳은 이미 예약을 할 수 없었고 애매한 거리에 있으면서 오래된 곳에만 예약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집 근처에 새로 알아본 산후조리원은 원래 예약했던 곳보다 오래되긴 했지만 집과 가까워 남편에게 조금 편할 것이라고 예상되며 좋다는 후기가 많고, 특히 모션베드를 쓸 수 있다는 점이 끌렸다. 장단점이 명확했지만 고민할 시간도 많지 않아서, 결국은 조금이라도 집 편한 곳이 마음이 편할 것이라 생각해서 급하게 예약을 했다.
그다음은 줄줄이 예약했던 내 희망의 결과들을 취소할 시간이었다. 야심 차게 계획했던 단풍구경 태교여행의 숙소들을 취소하고, 핸드폰에 저장해뒀던 가고 싶은 곳들을 지웠다. 연장해뒀던 운동도 전부 취소하고 환불을 받아야 했다. 원래 예약되어 있던 산후조리원과 연계된 스튜디오의 만삭 촬영도 취소했다. 이후 남편과 내 전화로 그래도 촬영은 무료로 해주겠다는 홍보 전화가 왔지만, 여러 군데 만삭 촬영을 할 만한 체력이나 마음의 여유가 없어 거절했다. 촬영은 새로 계약한 조리원과 연계된 곳과 하면 되니 아쉬움이 전혀 없었지만, 여행을 취소하면서는 많이 속상했다. 코로나19 전에는 다들 간다는 괌에 가서 미국 육아용품도 면세로 사 오고, 나도 좋은 호텔에서 잘 쉬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해외여행을 못 가는 시국이니 제주도 예쁜 숙소에서 바다를 보면서 쉬고, 남편과 둘만의 시간도 즐기고 싶었는데 그것도 혹시나 싶어 포기했다. 그래도 차를 타고 2-3시간이면 가는 지역에 예쁜 단풍이라도 보고 쉬어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내게 그것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속상했다. 남들 다 하는 걸 못한다는 생각과, 이제 아기를 낳으면 그런 여행도 힘들어질 텐데 벌써 금족령이 내렸다는 생각에 억울했다. 대신으로 갈 곳도 없었지만, 이제부터 대학병원 진료를 남편과 함께 다녀야 했기 때문에 남편도 휴가를 아껴야 했다.
임신 16주가 넘으면 입덧도 끝난다고 했고, 안정기라서 출산 전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라고 배웠기 때문에 기다렸던 시기였다. 하지만 내게는 병원을 옮겨야 하는 사건이 생긴 시기였고, 오히려 활동량을 줄여야만 하는 시기가 되고 말았다. 임신 초기보다 더한 불안이 찾아와서, 자다가도 이상한 느낌이 들면 벌떡 일어나서 혹시 출혈인지 지켜보느라 잠을 설쳤다. 겨우 입덧에서 벗어났는데 항상 불안을 동반하다 보니 식욕도 별로 없었다.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고, 다시 마음을 비우기 위해 드라마나 예능을 틀어놓고 수시로 아기 담요를 떴다. 뜨개질을 통해 반복적인 패턴으로 손을 움직이면서 머리를 비우다 보면 잠이 오고, 그럼 시도 때도 없이 잠을 보충했다. 그래도 자다가 몇 번씩 깨서 화장실로 가는 불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임신이란 정말로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음을, 쉬운 임신도 쉬운 출산도 없다는 것을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남들이 안정기라고 부르는 임신 중기도 그저 ‘상대적으로’ 안정이 될 확률이 높은 시기라는 것도 몰랐다. 입덧을 할 때보다 좀 낫고, 임신 후기에 배가 나와서 불편한 것들이 많은 시기보다 좀 낫다는 의미의 ‘안정기’였음을 나는 몸소 겪으면서 알게 되었다. 단지 주변에 임신을 경험하는 분들이 자기의 어려움과 힘든 점을 함께 임신을 경험하는 사람이 아니면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쉽게 내어놓기 어려웠을 뿐이다. 안정된 임신도 순산도 누구에게나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당연하게 되는 과정은 없었다. 내게 임신 중기는 이런 여러 가지 생각과 함께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