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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Aug 30. 2022

밤 산책

어쩌다 주간일기

매일 비슷한 것 같던 바람의 온도가 바뀌는 순간을 느낄 때 계절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낮에는 똑같이 뜨거워서 아직 8월이지, 여름이라고 생각하다가도 해가 지고 난 후의 바람은 여름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다친 손으로 하루 종일 아기와 집에서 지내다가, 아기가 8시가 되기도 전에 잠이 들어버리면 일찍 퇴근한 남편과 이 계절의 변화를 느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운동이 필요하던 남편도 헬스장 대신 나와의 산책을 선택했다. 아기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아기방의 CCTV알람을 켜 두고, 조용히 남편과 나와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아기가 깨서 울면 언제든지 집으로 달려들어갈 수 있을만한 거리만 걸어 다녔는데도 왠지 들뜨는 기분이었다. 임신했을 때부터 고위험 임부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었던 나에게 가을이 오는 신호를 느끼는 밤 산책은 너무나도 비일상적인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주변에 하천이 두 개, 공원이 두 개 있는 우리 아파트 근처에서는 선선한 바람이 불면 산책하기가 참 좋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남편과 손을 잡고 걷고 있으니 연애할 때 데이트하던 것도 많이 생각이 났다.


집에 있을 땐 아기가 잠든 후의 시간에 둘이서 TV를 보거나 밀린 집안일을 해치우고 잠들기 바빴다.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도 침대에 누워 얘기를 하다가 잠드는 경우가 많았고, 마음속에 있는 얘기를 하기가 힘들었다. 더위에 취약한 남편과 그런 남편을 닮은 아기를 돌보는 나는 여름이 내내 피곤했던 것 같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낀 날, 밤 산책을 가기로 결심한 날 드디어 이 긴 여름의 피로가 풀리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바람과 예쁜 나무들을 보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일은 정말 별 것도 아닌데 즐거웠다.


이번 주는 그래서 짧은 시간이라도 남편이 일찍 퇴근하면 아기를 재우고 꼭 산책을 나갔다. 7개월에 접어든 우리 아기가 너무 사랑스럽고 예쁘고 행복한 시간이 많지만, 아기와 분리된 나의 시간이 10분이라도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임신해서 지금까지 나를 위해 시간을 써야겠다는 생각조차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기와 나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은 맞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앞으로 어떻게 좋아하는 것과 해야 하는 일의 균형을 맞출 것인지도 다 미뤄두고 아기에 대한 생각만 해왔던 것 같다. 산책을 하면서 나는 남편과 계속 대화를 나눴고, 나와 가족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얘기뿐 아니라 소소한 농담이나 최근 들은 웃긴 얘기 같은 것들을 계속하며 많이 웃었다.


여러 날 밤 산책을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나는 3년 정도 연애를 했고 결혼한 지 4년이 넘었는데, 연애기간에도 남들과는 달리 거의 매일을 만나던 커플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이렇게 매일 할 말이 많고 했던 얘기를 또 해도 즐겁다는 게 신기했다. 나와 남편은 성격이 그다지 비슷하지도 않은데, 남편이랑 이렇게 자주 걸으면서 얘기만 해도 매번 나는 즐겁고 행복하다. 사랑의 방식과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나는 남편과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결혼한 후의 삶에 대해 물었을 때도 나는 늘 '세상에서 제일 잘 맞는 하우스메이트와 매일 재밌게 사는 기분'이라고 답하곤 했다. 물론 이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고, 아기를 낳고 나니까 친구이면서도 어려운 삶을 함께 이겨나갈 진정한 동지가 되어 더 끈끈해진 느낌이다.


남편에게 이러한 나의 생각을 말했더니, 남편도 동의를 표하며 이렇게 서로 잘 맞는 사람끼리 만나서 함께 삶을 꾸리는 것에 대해 어렸을 땐 기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사실 나도 남편도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게 쉬운 사람들이 아니었고, 그렇게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서로 놀랐다. 서로에 대해 이제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대화를 하다 보면 아직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나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예민한 사람이었고, 날카로운 부분도 꽤 있었다. 누구나 그런 부분이 있겠지만, 적당히 지내는 사람들에겐 허용적이면서도 오히려 나와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내 신념이나 결정에 대해 판단하고 얘기하는 것을 싫어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배우자에 대한 기대를 하면서도 이런 내가 다른 사람과 원만히 일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결정하고 추진하는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지시를 받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20대 초반에는 에너지가 넘쳐서 표현도 꽤 강하게 했던 것 같다. 쉽게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남편과 미래를 상의하고 크고 작은 문제를 결정할 때 남편의 의견을 먼저 들으려고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기하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와 남편은 20대 후반에 처음 만났는데, 나는 남편이 원래부터 배려가 깊고 부드러운 성품인 줄 알았고 남편도 내가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남편도 어릴 때는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고, 나와 연애를 하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서로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아기를 키우면서 또 다른 감정을 알게 되고 변하는 우리 모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과는 또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우리는 요즘 '내가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하는 감정을 자주 느낀다. 남편은 요즘, 이렇게까지 아기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하곤 한다. 아기가 자라면서 우리와 눈을 맞추고 웃고,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찾으며 상호작용하기 시작하자 점점 말할 수 없이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된다. 우리 아기를 사랑하게 될수록 우리는 다른 집 아이들도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되고 좀 더 기다려주고 좀 더 참아주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물론 우리보다 인품이 뛰어나고 깊은 사람이어서 아기가 없이도 이런 감정들을 이해하고 약자를 배려하며 타인을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기를 낳고 나서야 옛날 어른들이 왜 '아이를 낳아야 진짜 어른이 된다'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기를 키우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부분들, 알지 못했던 작은 배려들이 아기를 낳고 진땀을 빼는 순간마다 우리도 타인의 손길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모차를 잡고 낑낑댈 때 문을 열고 기다려주는 사람들, 엘리베이터에서 아기가 울어도 웃으며 참아주는 사람들, 식당에서 아기가 신나서 소리를 질러도 아기와 마주 웃어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기와 나도, 남편도 마음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럴수록 약자에게 쉽게 화를 내고 아무렇지 않게 어린이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무서운 기사가 자꾸 나는 것이 안타깝다. 그런 사람도, 우리 모두는 한 때 어린이였고 미숙했으며 사람은 모두 완성되어가는 존재이지 완성된 존재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요즘, 선선해진 날씨를 만끽할 수 있는 밤 산책 루틴을 너무나도 즐기고 있다. 여름에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는 것이 조금 아쉽고, 그만큼 아기가 빨리 커버린 것이 아깝기도 하지만 이제는 아기도 나도 다음 단계로 갈 시간이다. 많은 것이 여물고 완성품이 되어가는 가을을 맞이하며, 나는 밤 산책 동안의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보려고 한다.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아기의 깊은 잠과 좋은 날씨, 남편의 정시 퇴근이 갖춰져야만 가질 수 있는 이 시간이 되도록 길게 이어지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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