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도착한 김에 스벅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만일에 대비해 벤티로 들이부었다. 요즘은 주로 메가커피에서 커피를 마셔서 그런지 벤티로 마셔도 많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만일에 대비해 휴대폰을 빵빵하게 충전하려고 가방에서 충전기를 꺼내면서 편지를 발견했다.
딸에게 5월29일에 엄마는 알바하러 나갈거라고 말을 해두었었는데, 딸은 그날이 휴일인지는 몰랐던 것이다. 당연히 학교에 다녀오고 학원에 다녀와서 아빠랑 저녁을 먹고 잠시 쉬고 있으면 엄마가 오겠지 생각했는데 대체공휴일로 정해지면서 바로 전 날 왜 자기는 휴일에 엄마랑 있을 수 없는거냐며 별안간 폭풍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오열에 좀 당황스럽기도 했고 매일 붙어있는데 왜 갑자기 오열인가 싶고, 아이가 눈에 밟혀서 일하기 거북한 시절은 진작 지났기 때문에 오열이 그칠때까지 기다리고 나의 출퇴근 시간을 공지해주었다. 아직도 나는 사랑받고 있구나, 제9의 전성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싶어 안심이다 싶기도 하고 좀 지겹기도 하고 그랬다.
공지사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제 시간에 도착한 줄 알았지만 이미 도열해계신 분들 사이로 대표님과 죄송한 눈맞춤을 하는데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인사해주셔서 순간 당황하여 얼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명찰을 받고 팀복으로 갈아입고 내가 일할 창고로 안내받았다.
나도 사고싶은 으네의 옷들이 진열되어 있다.
예쁘네.
나도 구경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의 보직인 창고로 들어갔다.
멋지게 차려입고 강남의 한 백화점으로 온 들뜬 고객님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매장과 달리 창고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옷을 잘 모셔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옷을 모시는 우리의 불편은 스스로의 몫.
으네의 옷이 좋아서 오신 분들을 위해 옷이 구겨지거나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왔다갔다하며 주문들어오는 옷들을 찾아 밖으로 날랐다.
팝업 전 날 직원분들이 창고에 판매할 옷을 종류별로 분류해서 정리해 놓으셨다. 후에 들으니 새벽 4시가 넘은 시간까지 정리를 하셨고, 팝업날 아침엔 8시에 출근하셨다고 한다. 오프라인으로 매장을 한 번 여는 것이 보통일이 아닌거구나, 처음 알았다.
사실 계절 바뀔 때 내 옷장의 옷정리도 보통일이 아닌데 판매할 옷들을 새로운 장소로 이동시켜 놓고 또 구경하기 좋고 판매하기 좋게 정리해 놓는 건 당연히 보통일이 아닐 것이다. 몰랐던 건 아닌데 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새롭다기 보단 새삼스러운 것들이 있었다.
창고로 배치된 본사 직원분 포함 5명은 구간을 나눠 주문이 들어왔을 때 자기구역에 있는 옷이면 바로 꺼내 전달하는 일을 했다.
팝업 첫 날은 공휴일이라서 그런지 상당히 많은 분들이 와주셨고, 매장에서 고객응대를 하셨던 분들은 식사시간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셨다. 점심은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가까이에 보이던 프랜차이즈카페에서 스무디를 마시고는 빨리 복귀했다. 화장실 갈 시간도 사실은 여의치가 않기 때문에 무리해서 먹어두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오후에도 고객님들의 행렬은 이어졌고, 지칠 법도 했지만 오히려 활기가 더 넘치던 창고였다. 이 전에 일면식도 없고 관련업계종사자도 아닌데 그저 이 브랜드의 옷이 좋아서 알바를 자처한 속칭 '으네러'들이다.
그러니까 손님도 알바생도 모두 으네러.
참 재미있는 상황.
어쩌다가 이 옷을 알게 되었는데 참 잘 맞았고 느낌도 참 좋았고, 그래서 한 두번 사다보니 계속 사게됐고, 그러다보니 팬심으로 시작된 마음이 충성심으로 까지 발전한 것은 내 개인적인 일이었지만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었고 그들이 모여모여 팝업행사의 알바로, 고객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SNS에서 보던 분들도 실제로 뵈니 신기하고 재밌었고 쇼핑라이브할 때 나오셨던 모델분과 쇼호스트분들까지 만나다보니, 뭐랄까.. 뭔가 성덕이 된건가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학생시절에도 이렇게 현장에서 뛰는 일은 안해봐서 젊은이들이 열일하며 합을 맞춰 착착착 일을 해내는데 마흔넘은 내가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짐이 되지 않으려 긴장하고 정신차리고 있으면서 젊은이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니 다 인간엑셀들인가 싶더라.
맨날 뉴스에서 mz세대 까는 기사들만 접하다가 실제로 접한 mz세대들은 상당히 에너지있고 노련함도 있고 위트는 당연히 있는 멋진 사람들이었다.
스타일이 분명한 옷브랜드이기 때문에 이런 옷을 필요로 하는 직업군이 아마 한정적일 수 있고, 그래서 오신 분들의 느낌이 비슷한가 싶기도 했고.
이런저런 생각과 노동속에 저녁시간이 되었다. 여전히 긴장한 탓인지 배는 안고팠지만 8시반까지 있으려면 먹어두는게 나을 것 같아 뭔가 씹는걸 먹기로 했다.
고속터미널은 리모델링하고 나서 처음 가봤는데 밝고 새로웠다. 그만큼 비싸기도 했다. 그나마 저렴해보이는 분식집으로 갔는데
오징어덮밥이 만원이었다. 김밥과 우동류 빼고는 제일 저렴한 메뉴였다. 분명 그렇게 배는 안고팠는데 먹다보니 배고팠나 싶게.. 마시듯 잘 먹어부렀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오니 매장도 조금 한가해지고, 주어진 휴게기간동안 알바생들도 쇼핑에 참전할 수 있었다. 손님들이 많이 사가시던 옷부터 궁금했던 옷들을 입어보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청바지를 사고ㅋㅋ 필요할 것 같은(?) 자켓도 샀다.
팝업으로 이런저런 행사들이 있었다. 구매액수마다 랜덤뽑기도 있었는데 이렇게 저렇게 하다보니 산 옷보다 뽑은 옷들이 더 많아졌다.
몸은 피곤했고 뽑아 온 옷들도 (너무많아) 무거웠지만 왠지 신나는 마법^^
집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완전 반겨주었고, 자기들이 더 신나 쇼핑백에 있는 옷들을 다 풀어제꼈다. 자기들의 옷이 아닌데 막 입어보며 신나했다. 화장실에 있다 나온 남편이 거실에 펼쳐진 옷들을 보자
"알바비를 옷으로 받았어?"
"아니! 이거 랜덤뽑기한거야."
"랜덤을 이 만큼 주고 돈도 줘?"
"주겠지?"
"솔직히 말해, 괜찮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무슨 솔직함을 원하는거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랜덤으로 30만원상당의 트위드원피스를 뽑아서 나는 (창고)장안의 화제가 되었었고
사고 싶은 옷이 있었지만 팝업라인업에는 없어 아쉬웠는데 마침 랜덤으로 뽑은 옷도 있었고
무엇보다 내 인생에 이런 일도 있을까 싶었던 일이 일어나서 더 인상적이었다. 옷가게 알바는 20대에나 가능한거 아닌가 싶었는데 아직도 내 인생에 새롭게 일어날 일들이 있구나, 처음 해보는 일이 있고, 그 처음해보는 일을 하는 나이가 마흔이 넘어도 아무 상관 없을 수 있구나.
신기하고 신난다.
ㅡ
이후에 우리는 뒷풀이 식사를 위해 한 번 더 모였고,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일, 팝업 뒷 얘기, 자기가 좋아하는 으네의 옷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모두가 나름의 에너지를 가지고 멋지게 인생을 만들어가는 모습에 나도 힘을 얻었고, 나도 그 멋진 사람들 사이에 끼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남편의 우려와 달리 팝업 종료 일주일 후 즈음 통장으로 알바비가 입금되었다. 그 돈으로 으네옷을 사고 또 샀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