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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서아인 Mar 15. 2021

[쇠라] 내 안의 맑음 드러내기

그림이 미지 #3


사회적 거리두기 시대인 지금은 신인상주의 화가인 쇠라의 그림과 닮아있다.

우리는 지금 색점 하나하나 맑음을 유지하는 쇠라의 그림처럼 개개인의 가장 순순한 원색을 찾아가는 시기인듯하다.


미술관에 걸린 원본의 색채와 인쇄된 복제 이미지의 색채는 물론 다르지만, 그 이미지가 극명하게 다른 느낌을 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점묘화를 그린 신인상 주의 작품들을 추천한다.

쇠라  <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 1886


"그들은 초록색을 만들기 위해서, 노랑과 파랑을 파렛트에서 섞어, 그 채도(맑은 정도)를 떨어뜨리는 대신에,

  캔버스에서 직접 노랑점 사이에 파랑 점을 찍어서 멀리서 두 색이 섞여 마치 초록색처럼 보이는 착시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색을 혼합하였다"


그러니 물리적 상태 즉, 파레트 위에서 색은 직접 섞이지는 않았기에 원래, 노랑과 파랑이라는 맑은 원래의 채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파란 색점과 노란 색점이 섞여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사회의 운영을 위해, 우리의 색을 모두 잃어야만 했다.

나는 이 집단주의 문화 속을 살아가는 개인이 아닌 내 색을 지워버린 가짜 자아상을 유지한 채 살아가야 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이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거짓 생각을 내 의식에 연결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미니멀리즘 세잔처럼, 내 안에서 불순물의 형태인 생각을 모두 제거해버린 채, 이제 우리는 쇠라가 그랬듯이 색의 원형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모두가 교복을 입고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멀리서 보면 그 질서가 엄격하게 정리되어 보이지만 그 색채는 심히 탁하다.

모두가 개별적인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라는 각자의 색채를 지녔지만, 우리는 그 색채를 물리적으로 팔레트에서 섞어 한 가지 색을 만들어야 했다.


'모든 색을 하나로 섞으면, 검은색이 나온다.'


그 검은색은 모든 색을 다 품고 있지만, 개성이 없는 검정이기에 매우 탁하다.

그렇게 우리는 한 건물을 이루는 벽돌로써 존재했다.

그리고 이제 천천히, 잠시 건물이라는 전체에서 내게 집중하며 우리는 그 작은 벽돌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세잔의 그림이 말한다.

"나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버려내도 된다."


그리고 진짜 내 색채를 내기 위해서, 팔레트에서 섞였던 색들은 원래의 색으로 나누기 시작한다.


"난 원래, 빨강이었어. 그랬구나 검은색 속에 있어서 안보였어."

"난 원래 노랑이었어, 반가워."


이렇게 원래의 색을 찾은 우리들은 정말 맑디 맑다.

개별 의식이라는 순수성을 최초로 경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의 보편적인 진리는 존재하되, 우리 각자의 진리와 각자의 세상은 분명 존재한다.

마그리트가 우주에 달은 하나지만, 우리 각자의 달을 바라본다고 얘기했던 것처럼,

각자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르네 마그리트 < The mysteries of the horizon > 1995


그 시공간은 전체로서는 하나이지만, 동시에 분명히 개인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하나하나의 원색이 찍혀, 노랑과 파랑이 팔레트에서 섞이지 않고,

화폭에서 거리를 유지한 채 섞여 내는 초록색은 맑디 맑은 빛을 드러낸다.

그 맑고 환한 느낌은 인쇄된 매체로는 표현이 어려워서, 실제 원작과 인쇄된 이미지의 차이를 가장 크게 드러내는 작품들 중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점묘법 화가인  '신인상 주의' 작품들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시대순으로 전시되어 있던 쇠라의 작품을 보았을 때, 고흐의 작품 후에 만나는 신인상주의 작품들은 마치 오렌지색을 빛을 뿜고 있는 듯 청량한 느낌이었다.

아직 캔버스라는 회화 양식이지만, 마치 UHD TV에서 빛으로 표현되는 색채처럼 청명한 느낌을 당시의 캔버스와 물감만으로 최대한 발휘해 주었다.




이렇게 각자의 원색을 찾아, 스스로를 깨달아 내면의 빛을 표현하는 각자의 우리가 모인 세계는 어떨까?

그곳 역시 색채는 이전의 '집단주의' 색채처럼 모든 색을 머금고 있다.

하지만 이전의 물리적인 세계의 얽힘으로 각자의 빛인 맑음을 잃어버렸다면, 이제 우리는 물리적인 세계에서의 섞임이 아니라, 각자의 색을 유지한 채 새로운 공동체라는 색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때  ‘, , , , , , ’가 모두 하나가 된다.

그때의 하나 됨은 검정이 아니라 흰 빛으로 표현된다.


하나의 자각 의식을 일깨운 고유의 색들은 빛의 파형으로서 서로 만나게 되고, 색이 모두 합쳐진 것이 아닌,

모든 색감의 빛이 합쳐졌을 때는 검은색이 아닌 하얀빛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 , , , , , ’라는  들이 모두 섞이면 검정이지만  빛들이 섞이면  빛이 된다.

물감을 모두 섞었을 때는 검은색이지만, 반짝이는 미러 볼의 빛들이 모두 모이면  빛이 되는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좌) 빛의 3 원색 / (우) 색의 3 원색


쇠라의 색점들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작품 전체의 맑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의 사회적 거리가 장기간 유지가 되는 것은, 물리적 얽힘에서 잠시 머물러 ‘나’라는 개체의 고유한 빛을 찾기 위한 여행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코로나 시국으로 인한 재택근무, 원격 교육 등은 적절한 물리적 얽힘을 유지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고찰을 더욱 깊이 이루어낼 듯하다.


그리고 홀로서기를 시작한 각자의 색채들은 훗날 내면의 빛을 발견하고, 색에서 빛을 쏟아내는 그러한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맑은 채도의 원색적인 개인들이 함께 하는 세상은 얼마나 맑고 찬란할까?


피카소가 야수파 화가인 마티스에게, '마티스의 뱃속에는 태양이 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때가 되면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빛나는 색채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을까?

마티스 < 이카루스 >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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